외부칼럼 기고

[신달자에세이] 본심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다면…우리는 행복한 사이겠지요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5.16 18:33

수정 2023.06.22 08:56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말은 사랑이다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말(言)은 인간의 특권이라 사람들은 날마다 말을 하고 산다. 사실 눈만 뜨면 하는 것이 말 아닌가. 상대와 의견 소통도 말이고, 가르치는 교육도 말이고, 사회가 도덕적으로 형성되어 가는 일도 모두 말로 이루어진다. 말이 없다면 인간세상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 흔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진정하게 반드시 해야 하는 말에는 우리가 너무 인색할 때가 많다. 한국 사람들은 침묵을 금(金)으로 지정해두고 말하는 것을 상스럽게 생각한 때도 있었다. 말이 많으면 방정맞다고 야단맞았고 밥 먹을 때는 말이 금기(禁忌)인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본심은폐증(本心隱閉症)이 한국 사회에는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왜 좋다고 말하지 않느냐고 따지면 마음에는 있다고 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온 것이다.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는 사랑이나 정(情)을 혼자 생각만으로 만족해한 한국 사람들의 마음은 그래서 윤기(潤氣)가 없었다. 팍팍하고 가파르고 날이 서 있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말에 뼈가 있다"는 말도 사용했다. 한국 사람들의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쌓아둔 말은 북한산보다 높을지 모른다. 그 세월을 살면서 어디서 위로를 받았을까. 위로는 없었고 포기가 많았다. 그래서 특히 내 어머니 시대의 여성들은 한숨이 많았고, 한숨이 길었고, 한숨을 들이켰다. 누구 하나 "힘들지요?"라고 위로한 사람이 없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산다고 믿고 모든 불만과 억울함을 꿀꺽 삼키는 일에만 능하였던 것이다.

왜 사랑한다 고맙다 말하지 않느냐 물으면 마음속에 다 있다는 당신, 하지만 마음은 보이지 않아요. 그걸 보여주는 것이 말 아닐까요.

그래서 위장병이 많았고, 그래서 "속 터져 죽었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나는 정말 배가 터진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오죽 답답하게 혼자 삼키고만 살아서 속이 터지는 불상사가 났겠는가. 그것이 한국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시대는 놀랍게 달라졌다. 스마트폰 문자로 하루에 백번도 더 넘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시대이지만 아직도 마음의 말을 쉽게 꺼내지 못하는 사람은 많다. "말해야 맛인가요? 나도 마음에는 다 있거든요." 아내와의 싸움 끝에 답답하여 내게 상담 겸 이야기한 어느 남자의 말이다. 부부의 사랑은 유효기간이 짧다. 마음만 믿으라고 하면 그것은 무리한 요구다.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 보이지 않는 마음을 보이게 하는 것이 말인지 모른다.

이 세상에 완벽한 행복은 없다. 고통이 따르지 않는 행복도 없다. 이 세상에 단 한 개의 걱정이 없는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사실 말만 적당히 잘 표현하면 웬만한 어려움은 잘 지나갈 수 있는지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현실을 그런대로 잘 끌어가기를 소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선가 발목을 잡는 빌미의 따스한 손길이 필요하다. 종일 스트레스 속에서 부딪치며 사는 남자에게도, 종일 자잘한 집안일로 비슷한 일들과 싸우는 여자도 속이 터질 것 같은 것은 마찬가지다.

집에 가면 볼 것이지만 신선한 아침에 목소리라도 듣거나 문자라도 날리며 "당신 오늘도 힘내요"라고 서로 마음을 전달하면 픽 웃겠지만 그 마음은 피로해소의 원동력이 될 것이다. 가까운 사람이 날 알아준다는 그 믿음 하나가 하루의 피로를 푸는 출발점이 된다면 누가 그것을 마다하겠는가. 마음에만 두지 말고 마음을 꺼내어 상대에게 안겨야 한다는 것을 한번 더 다짐해야 할 것 같다. 대화가 보약이라고 해서 옛날 어느 날 남편과 늦은 밤에 와인 한 잔을 하다가 내가 한 마디, 남편이 두 마디 세 마디 하다가 우리는 큰 소리로 싸움이 났다. 우리는 다 같이 "우리는 안 돼, 다른 부부 다 돼도 우리는 안 돼"라고 단정을 지었다. 지금은 후회스럽다. 내가 그의 약점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거 아닐까. 약점 지적보다 위로가 먼저다. 가끔은 서로 마음을 트라고 나는 말한다.

이제 그 마음을 꺼내 상대에게 보여주자 다짐하면 어떨까요. 한바탕 지껄이고 나면 쌓이고 쌓였던 감정의 두께가 얇아지는 걸 느낄거예요.

사람마다 혹은 다정한 부부라도 마음의 벽이 있다. 사실 그 벽을 터야 더 친한 관계가 된다. 자식을 낳고 살아도 그 벽을 트지 못하면 그만큼 마음의 무게를 안고 살게 된다. 그것을 상대가 모르겠는가. 말하지 못하는 고립을 서로 안고 산다면 그것은 잘못된 그림이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서로의 본심을 무리 없이 말하는 부부가 세상에서 가장 잘사는 부부라는 생각을 부부의 날을(5월 21일) 앞에 두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 속에는 무수한 인간의 역사가 숨어 있다. 부부의 행복이 가정을, 사회를, 국가를 들어올리는 힘은 여기서 출발하는 것은 아닐까.

누가 말했다. "요즘 여자들 카페나 식당 차지하고 종일 떠들어대는데 속이 답답하다고?" 그만큼 떠들고도 답답하다면 이유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친구들은 나이가 들어서 조금씩 말이 줄었다. 그것이 슬프다. 밥 먹고 차 마시고 이것저것 몇 마디 하다가 피곤하다며 일어선다. 그것이 슬프다. 한때는 우리도 서로 말하기 대회라도 나온 듯 각자 밥 먹다가도 일어서서 연설을 하다가 조금 민망했을까 "수다의 수자는 목숨 수(壽)야!"라고 속웃음까지 끌어낸 친구도 있었다.

친구끼리 만나면 지치지도 않고 없던 힘도 치솟아서 할 말 안 할 말 하고 몸의 정신의 갈등을 풀어내는 것이리라. 한바탕 지껄이고 웃고 집에 가면 집안의 불편한 점도 대충 지나갈 만한 것이다. 쌓이고 쌓인 심층 감정의 두께가 얇아지는 걸 느낀다.
한번 털어내었기 때문이다. 그걸 우리는 치유라고 부른다.
그렇게 감정 억압을 풀면 집안의 문제도 어쩐지 쉽게 풀 것만 같은 것이다. 부정적 감정을 깊이 숨기지 말고 드러내 표현하는 관계 유지야말로 우리들 가짜 감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고, 행복한 인간 관계로 나가게 되지 않을까요.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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