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노주석 칼럼] 이민의 정치사회학

노주석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5.24 18:25

수정 2023.05.24 18:25

[노주석 칼럼] 이민의 정치사회학
코로나가 발병하기 얼마 전 독일 베를린에 갔다가 즐거운 경험을 했다. 독일식 케밥을 맛보려고 유명 맛집 앞에 2시간 가까이 줄을 섰다. 튀르키예인이 운영하는 노점이었다.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빵에 고기를 넣어 먹는 '되네르(회전) 케밥'의 원조가 베를린이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케밥이 베를리너의 솔푸드가 된 이유는 단순하다.
1960년대 튀르키예인 노동이주자가 쏟아져 들어오면서 독일인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것이다. 싸고 푸짐한 데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문을 여니 그럴 만했다. 이민자의 음식이 빛을 발한 사례이다. 재미를 본 독일 정부는 최근 '독일에서 성공하기'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외국인 근로자의 취업문턱을 낮추고, 이중국적을 허용하며, 시민권 취득조건을 완화한다고 발표했다. '이민의 나라'로 불리는 프랑스에선 다민족·다문화가 정착된 지 오래다. 두 '늙은 제국'엔 요즘 활기가 넘친다.

일본은 3년 전, 대만은 15년 전부터 이민 전담부처를 운영 중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걸음마 단계다. 출입국·난민은 법무부, 다문화가정은 여성가족부, 재외동포는 외교부, 외국인 근로자는 고용노동부, 외국인 주민은 행정안전부 등 여러 부처에 업무가 흩어져 있어서 효율적인 정책 수립과 추진이 어렵다.

120년에 걸친 한인 이민사를 통해 730만명의 재외동포가 180개국에 산다. 한국은 인구 대비 재외국민 규모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이민자는 인구의 5% 남짓이다. 이민자 220만명 중 조선족 동포가 84만명쯤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 중 꼴찌였다. 역대 정부의 저출산대책은 백약이 무효로 결론이 났다. 세계 최저·최악의 출산기록을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다. 호들갑 떨고 싶진 않지만 대한민국은 소멸 직전이다.

세계적인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 옥스퍼드대 명예교수는 "한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했지만, 그 대가로 이를 물려줄 다음 세대가 없어졌다"면서 "한국은 2750년에 국가소멸 위험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마이클 크레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도 적절한 이민정책을 저출산 위기의 대응책으로 꼽았다.

유명을 달리하신 노모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조선족 간병인의 도움을 받았다. 기약 없는 병간호가 이어지면서 우리 가족은 역경에 처했다. 그분의 24시간 수발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 땅의 외국인 근로자는 맞벌이 부부의 손발 역할을 했고, 식당과 공장의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이들이 없었더라면 농수산업과 산업의 현장은 진작 멈췄을지 모른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민자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 가성비 높은 마라탕과 뀀맥(양꼬치+맥주)을 즐기게 된 건 덤이다.

미증유의 '출산파업'에 언제까지 냉담할 텐가. 다민족·다문화 사회로의 이행을 거부할 순 없다. 단일민족이라서, 꼴 보기 싫어서, 일자리를 빼앗기기 싫어서 같은 늘푼수 없는 이유를 계속 대기도 어렵다. 세계는 이민정책에 성공한 강대국과 실패한 약소국으로 나뉜다. 이민의 확대가 국가소멸을 막을 마지막 수단이다.
이민자 수용의 유연성이 국가의 정치적 안정과 미래를 담보한다. 이민청 설립을 서두를 때다.
국민이 국력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joo@fnnews.com 노주석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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