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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달자에세이] 우리를 방황하게 만드는 이 시대, 하나의 선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6.20 18:16

수정 2023.06.21 16:41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명품인생으로 산다는 것은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시대는 우리를 바쁘게 한다. 이 시대는 우리를 번거롭게 한다. 그렇다. 이 시대는 우리를 방황하게 만든다. 이 세상은 너무나 할 것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또한 뭐든 해서 될 것처럼도 보인다.
하나를 딱 선택하기가 너무나 어려워 보인다. 광고, 홍보 뭐 이런 것 때문일까? 어디를 봐도 좋다고, 이것이면 인생은 모두 다라고 떠들고 있다. 날마다 우리는 과도하고 황홀한 홍보를 들으며 살고 있다. 문제는 사람의 의식이고 판단이다. 지금 이 시대는 가장 인간의 올바른 판단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하나의 선택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니까.

'재미'를 따진다. 인생에 재미가 없으면 그것은 인생이 아니라고 말이다. 과연 재미있는 생이란 뭘까.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재미를 강조하는 것 같다. 그러나 무심하게, 덤덤하게 사는 일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 정도만 살아도 재미있는 삶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적당히'보다 더 어려운 말은 없다. 맛을 따진다. 건강을 셈한다. 그리고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 지금 시대의 가장 뚜렷한 화두다.

우리들 나이쯤 되면 자식들을 모두 혼인시켜 보내 놓고 부부가 안정적으로 사는 친구들이 많다. 여기서 안정적이라는 말은 자식 다 혼인시키고 얼마만큼 생활비를 걱정하지 않고 주변에 이렇다 할 걱정거리가 적은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내 친구들은 거의 그렇게 산다. 부부가 감동적으로 눈부시게 살지 않는다고 해도 집 안에서 마주치면 눈웃음 한번 치지 않고 살고 있지만 그들은 나쁘지 않다. 그들은 말한다. 심심하다고. 늙은 아내를 바라보는 일과 늙은 남편을 바라보는 일이 싱겁다고. 아니 귀찮다고까지 한다. 그러면서 담담하게 웃는 그들이 행복하게 보인다.

그 편안한 행복이(나는 행복으로 보인다) 젊은 날 오직 하나의 길을 걸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의 그 평범한 행복이 젊은 날 오직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은 짜릿한 게 아니고 오히려 덤덤하다고 말하면서 재미없다고 말한다. 재미? 그것은 너무 과분한 욕심이다. 그들이 말하는 재미는 그들이 젊은 날에 모두 까 먹은 밤이다. 하얀 속살을 다 파 먹은 밤 같은 것이라고 내가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하나를 위해 잠을 줄이고 육체적·정신적 노동을 늘렸다. 지금은 다른 재미를 찾아야 한다.

젊은 날에는 고생만 했으니 무슨 재미가 있었느냐고 말하지만 결국 생의 재미는 누구에게나 고르게 나누어져 있다. 젊은 날이라고 하늘이, 햇살이, 꽃이, 새가 없었겠는가. 그저 정신 놓고 사느라 그런 무상의 선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다.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살아 온 그 엄청난 예술을 이제야말로 넉넉히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노년은 결코 나쁘지 않은 것이다. 다 끝낸 것처럼 보내는 친구들 사이에 보석같이 아름답게 사는 내 친구 부부가 있다. 이들 부부는 다 퇴직을 하고 앞으로의 설계도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돈 많이 안 주고 가장 즐거운 것을 많이 하자는 것으로 두 사람의 마음을 모았다고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가까운 산에 가고, 자연의 변화를 보고, 식사는 두 사람이 돌아가면서 뭐든 해내고, 맛이 없어도 웃으며 먹는다. 오후는 돈 안 주고 구경할 수 있는 그림 전시회를 일주일에 두 번은 꼭 간다는 것이며, 젊은이들이 노는 대학로를 걷고, 때로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한국의 가 보지 않은 도시를 구경하는 일이란다

그러나 그중에 내가 가장 놀라워 한 것은 두 사람이 꼭 지키는 일주일에 한 권씩 읽는 책이다. 책 목록을 정하고 읽고, 독후감도 써 보고, 서로 웃고, 잘 쓰지 않아도 되고, 부족하면 그런대로 다시 웃고 그렇게 사는 부부가 있다. 더욱 예뻐 보이는 것은 자식들에게 전화보다 편지를 더 많이 쓴다는 사실이다. 언제 우리가 자식들에게, 친구들에게 고요히 마음을 다듬고 편지를 써 본 적이 있는가. 퇴직 후는 그런 시간이 있다고 그는 말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중에서도 남들이 하기 어려운 고시를 서로 읽는 것인데, 이달에 읽은 시가 이옥봉의 그 아름다운 절창의 노래였다고 한다.

근래의 안부는 어떠신지요

사창에 달 떠오면 하도 그리워

꿈속 넋 만약에 자취 있다면

문앞 돌길 모래로 변하였으리

1550년에서 1600년 사이의 생을 살다간 아름다운 이옥봉은 보고 싶은 애인의 창가를 너무나 많이 밟아서 돌이 모래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눈물나는 절창을 노래한 것이다. 얼마나 님을 그리워 했으면 돌이 모래가 되도록 님의 창가를 맴돌았을 것인가. 과장법이겠지만 그 애타는 그리움은 잘 전해 오는 시다.

나는 시를 서로 주고받고 서재에 가서 없는 시는 서점에도 가서 사기도 하며 사는 내 친구 부부가 가장 명품인생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라고 견디어야 할 것이 없겠는가, 속 터지는 일이 왜 없겠는가. 그러나 훌훌 털고 가끔은 하늘을 보며 다시 시작하는 것이리라. 소주도 가끔 거나하게 마시는 이 늙은 부부가 그렇게 함께하는 것은 어느 예술품보다 훌륭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향, 앞선 선조들까지 빛나 보이게 하는 힘이 있어 보인다. 더 중요한 것은 귀찮으면 한 달쯤은 아무것도 안하고 각자 알아서 산다는 대목이다.


그 친구는 내게 새로운 힘을 부여했다. 나 혼자서라도 할 수 있는 명품을 찾게 하는 힘을….

[신달자에세이] 우리를 방황하게 만드는 이 시대, 하나의 선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신달자 시인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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