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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이 돈을 포기했다?" 독립운동기업 유한양행의 '100년 신념' [광복절에 만난 기업]

박상훈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8.14 16:09

수정 2023.08.16 08:07

<上> 국산 폐암치료제 '렉라자'를 개발하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
유한양행을 창립자 유일한 박사의 신념이다. 그는 1926년 일제강점기, 변변한 약이 없어 죽어가는 동포들을 위해 제약회사를 만든 사회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다. 그가 세운 기업 '유한양행'은 창립자의 정신을 잊지않고, 2023년 또한번 획을 긋는다. 환자 1명마다 연간 7000만원을 받을 수 있는 약값을 포기하고, 무상제공하겠다고 선언한다. 78주년 광복절을 앞두고 독립운동기업 유한양행의 최근 행보를 2회에 걸쳐 조명한다.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제공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제공
[파이낸셜뉴스] 식약처가 최근 유한양행이 개발한 신약 ‘렉라자(성분명 레이저티닙)’를 상피세포성장인자수용체(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의 1차 치료에 사용하도록 허가한 가운데, 유한양행의 렉라자 개발 과정과 국내 폐암환자들에 대한 렉라자 ‘조기 공급 프로그램(EAP)’를 실시한 배경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특히 제 78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와 국민에 대한 헌신을 신조로 삼은 ‘독립운동 기업’ 유한양행의 렉라자가 한국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바이오 산업의 선두주자로 설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나오고 있다.

'국민에 대한 헌신' 유한양행이 걸어온 100년

유한양행을 창립한 고(故) 유일한 박사는 교육자이자 사회사업가, 독립운동가이다. 생전에는 독립 운동에 헌신하고, 사후에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인물인 그는 1895년 평양에서 출생해 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유일한 박사는 고국에 단순한 약조차 없어 동포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31세가 된 1926년 고국으로 돌아와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창립했다.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을 세운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유한양행을 세운 이후에도 미국에서 광복군인 ‘한인 국방경위대’를 창설하는 등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광복 이후에도 기업 활동을 통한 사회환원에 전념했다. 그는 “좋은 제품을 만들어 동포에게 봉사하고 양심적으로 세금을 납부하여 정부를 돕는다”는 신조로 기업을 운영했다.

이와 같이 국가와 국민에 헌신하고자 하는 유일한 박사의 신념에 따라 세워진 유한양행은 창립 100주년이 다가오는 시점에 렉라자 개발에 성공했다. 유한양행은 단순 렉라자 개발에 그치지 않고 EAP를 통해 렉라자를 환자들에게 보험급여가 적용될 때까지 무상 공급하기로 결정했다.

유한양행 R&D 김열홍 사장은 “표적 폐암 치료제의 한 달 투여에 보험급여가 되지 않는 경우 600만원이 넘는 비용이 들기 때문에 환자들의 부담이 크다. 환자들에게 보험급여가 될 때까지 국산 신약을 지원하는 것은 제약사로서 당연한 책무”라고 밝혔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라는 말을 남긴 유일한 박사의 신념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AZ '타그리소'가 선점한 시장서.. '렉라자' 개발 성공하기까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글로벌 시장에서는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성분명: 오시머티닙)가 EGFR 돌연변이 양성 비소세포폐암 1차 치료제로서 시장을 선점한 상황이다. 현재 글로벌 시장에서 타그리소의 점유율은 70% 이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 유한양행의 렉라자는 ‘출발이 늦은 토끼’로 시작했다.

렉라자 임상 시작단계에서 타그리소는 미국과 유럽 등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렉라자의 글로벌 임상 3상 시작 당시 미국, 유럽 등 주요 국가들에서 타그리소가 이미 1차치료제 표준요법으로 자리가 잡혀 있는 상태였다. 이에 유한양행은 글로벌 3상 임상을 위해 아시아태평양지역 국가들 외에도 러시아, 우크라이나, 튀르키예, 세르비아, 그리스, 헝가리, 호주 등으로 향했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튀르키예 지진 등 외부 변수가 발생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모든 임상 시험을 주관하며 렉라자 개발을 담당했던 유한양행 임효영 부사장은 “임상시험 개시가 본격화할 2020년 초부터 코로나 유행으로 인해 병원 방문이 엄격하게 제한되어 모니터링 방문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환자들도 직간접적인 격리 등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며 “폐암환자들은 코로나 감염에 취약할 뿐만 아니라 감염 시 사망 및 이환율이 높아서 이로 인해 연구 결과에 부정적인 영향이 발생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원격 모니터링 등 필요한 절차를 수립하고 면밀하게 추적 관찰하였다”고 밝혔다.

또 임 부사장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초반에 그로 인한 물리적 피해가 급증하였을 때는 거의 매일 전세를 확인하면서 연구 기관과 피험자 상황을 확인하며 대책을 논의했다”고 떠올렸다.

렉라자. /사진=유한양행 제공
렉라자. /사진=유한양행 제공
출발 늦었지만 '전력질주'...한국인 환자군으로 임상 3상

그러나 ‘출발이 늦은 토끼’는 ‘전력질주’를 했다. 임 부사장은 “출발은 늦었지만, 우리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고 확신했다”며 “비록 타그리소가 1차 치료제로서 허가 받고 실제 임상 진료 상황에서 널리 쓰여지고 있으나, 개별 국가의 인허가 규제의 다양성 및 높은 약가로 인해 허가 및 급여가 늦어지는 등 접근성이 낮은 국가들 중심으로 임상을 운영하자는 전략이 적중하여 원래 계획보다 모집기간을 수 개월 단축할 수 있었다” 떠올렸다.

유한양행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하게 한국인 환자 그룹 데이터를 보유한 글로벌 임상 3상 시험을 설계하였고, 국내 다수의 의료기관의 협조에 힘입어 172명의 환자를 임상 시험에 참여시켜 한국인에 대한 렉라자의 유효성 또한 입증할 수 있게 되었다.

렉라자의 한국인 환자군 임상 3상 시험에 참여했던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이경희 교수는 “국내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 환자 치료의 확실한 근거가 될 수 있는 한국인 환자 그룹 데이터가 확보된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며 “국내 의료진과 향후 한국의 바이오 기업들이 국산 신약 개발 과정에서 임상 3상 시험을 진행하는데 있어 토대가 되어줄 값진 경험을 얻었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임상 시험을 주도했던 연세암병원 종양내과 임선민 교수 역시 “타그리소는 1차 치료에서 무진행생존기간 18.9개월, 전체생존기간 38.6개월을 달성한 약으로 1차 치료에서 효능과 안정성을 모두 인정 받고 쓰이고 있었지만 아시아인에서 효과가 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며 “렉라자는 아시아인 및 한국인 하위 집단에서도 우수한 효과가 일관되게 나타났다는 것이 특징”이라고 짚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글로벌시장 50% 차지할 것” 자신감

유한양행의 자체 글로벌 임상 시험은 현재 완료된 상태이며, 해외 판권 라이선스를 계약한 얀센사의 글로벌 3상 임상 데이터도 10월 경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유한양행 오세웅 중앙연구소장은 “여러 회사들과 논의하던 중 얀센사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며 “마지막까지 경합하던 중국계 다국적 제약사는 실제 계약금 규모 등 재무적 측면에서 더 좋은 제안을 하였으나, 렉라자를 진정한 글로벌 신약으로 개발해 줄수 있는 의지와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얀센사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또 김열홍 사장은 “현재 미국 폐암가이드(NCCN) 표준치료제가 타그리소인데, 얀센의 글로벌 임상 시험 결과가 좋으면 렉라자 단독 사용 또는 렉라자와 얀센의 항체 치료제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 새로운 글로벌 표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렉라자와 타그리소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유한양행 관계자들은 임상 결과에 따라 렉라자가 향후 보수적으로 글로벌 시장의 5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일부 의료계 전문가들은 렉라자와 타그리소가 제약계의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처럼 경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임 부사장은 “일상 진료보다 자주 병원을 방문하여 시험계획서에 지정된 여러 검사를 시행해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시험에 참여해 주신 환자분들과 보호자들께 진심으로 감사할 따름”이라고 밝혔다.

sanghoon3197@fnnews.com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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