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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우의 심사숙고] 대통령의 편지

이석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8.31 18:20

수정 2023.09.05 10:18

이석우 파이낸셜뉴스 대기자 (2023.09.04 사진=박범준 기자)
이석우 파이낸셜뉴스 대기자 (2023.09.04 사진=박범준 기자)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89년 6월 20일 직접 쓴 손편지를 중국 최고지도자 덩샤오핑에게 비밀리에 보냈다.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사태' 발발 16일 만이었다. 미국 의회는 대중 제재를 결의했고, 대통령 자신도 고위급 교류 중단 조치를 취한 뒤였다.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위대에 대한 계엄군의 유혈진압으로 미중 관계는 얼어붙으며 추락하고 있었다.

부시는 서신에서 체제 다름을 존중하지만, 미국의 건국이념과 기본가치를 기억해 달라며 덩에게 제재 발동의 불가피성을 설명했다. 시위대에 대한 선처 등과 함께, 새로운 채널로 직접 소통도 제의했다.


부시의 편지는 덩의 화답으로 그해 연말까지 4차례 더 이어졌고, 안보보좌관 등을 대통령 사절로 중국에 보내 현안 조율 등 관계 안정의 계기를 마련했다.

공식 무대에서는 제재라는 채찍을 들면서도, 막후에서는 이해를 구하고 우정을 표시하는 노력은 덩의 호응과 협력을 이끌어 냈다. 두 나라는 이런 과정을 거쳐 구축한 전략적 이해와 경제적 이득을 30여년 가까이 나눠 가질 수 있었다. 국제사회에서 유사한 예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지도자의 결단, 정치적 융통성은 외교적 돌파구를 만들어 낸다.

한·중은 지난주(8월 24일) 최악의 상황이라는 평가 속에서 수교 31주년을 보냈다. 베이징 당국은 서울 측이 사활적 이익인 대만 문제와 관련, 주변국과의 연대를 언급하는 등 전과 달리, 원칙적인 입장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고 날을 세웠다. "예전에 가동됐던 소통 채널들도 막혀 있고, 충분한 현안 설명을 들을 길도 없어 한국 입장을 이해하기 어렵다"며 성난 목소리다.

미국 일변도로 중국에 각만 세워온 듯 보이는 일본도 다양한 채널로 경직된 공식 외교통로를 보완하며 관계개선을 꾀한다. 원전 오염수 방류로 미뤄졌지만, 연립여당 공명당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는 8월 28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친서를 들고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만날 예정이었다.

앞서 지난 7월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국회의장)의 방중은 민간채널을 활용한 '트랙2 외교'로 운신의 폭을 넓혔다. 그는 일본국제무역촉진협회 대표단을 이끌고 지난 7월 3~6일 왕원타오 상무부장, 왕이 외교총괄 정치국원, 이창 총리 등을 만나 정경분리와 경협확대를 강조하면서 반간첩법 등 일본의 우려를 부각시켰다.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의 8월 30일 나흘간의 중국 방문도 앞선 국무·재무 장관의 방중처럼 대화의 제도화 구축을 시도하면서 견제와 관여, 압박과 설득을 병행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국민적 반감과 당국 간 불신이 커지는 등 여기저기 꽉 막힌 한중 관계의 물꼬를 어디부터 풀어야 할까. 갈등이 충돌로 번지지 않게 관리하며, 현명한 주고받기로 동반성장의 과실을 늘려나갈 자존과 협력의 틀과 전략이 아쉽다. 정치적 융통성과 비전, 결단을 기대한다.
방치하기에는 너무 사활적인 관계다.

june@fnnews.com 이석우 이사(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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