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검찰·법원

유령법인인데 허위신청서로 계좌 개설…대법 "은행이 추가 확인해야"

조윤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9.20 07:53

수정 2023.09.20 07:53

그래픽=홍선주기자
그래픽=홍선주기자

[파이낸셜뉴스] 보이스피싱범에게 대여하려고 예금거래신청서를 허위로 작성해 대포통장을 개설했더라도 은행 직원이 부실하게 심사했다면 업무방해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대법원 2부(주심 이동원 대법관)는 업무방해·전자금융거래법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인천지법에 돌려보냈다고 20일 밝혔다.

A씨는 2020년 8월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성명불상자에게 자신의 주민등록증과 인감도장을 대여해 자신이 대표이사인 유령법인을 설립한 뒤, 법인 명의 계좌를 허위로 개설해 금융기관 담당 직원의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또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될 것을 알면서도 계좌에 연결된 현금카드, OTP 기기 등을 전달한 혐의(전자금융거래법위반)도 있다.

1심은 A씨 혐의를 모두 유죄로 보고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업무방해 등 일부 혐의를 무죄로 뒤집으며 징역 1년으로 감형됐다.


공소 사실에 A씨가 인식한 범죄 내용이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않았고, A씨가 허위 답변을 기재하는 등 것만으로는 피해 은행의 직원을 기망한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에서다.

대법원은 업무방해를 무죄로 본 원심 판단을 타당하다고 봤지만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 부분은 달리 판단했다.

계좌기설 신청인의 허위 답변 만을 그대로 믿고, 추가적인 증빙자료 요구 업이 계좌를 개설한 것은 이를 철저히 검증하지 않은 은행 직원 등 금융기관 측 잘못이라는 것이 대법원 지적이다.

대법원은 "금융기관 업무 담당자가 답변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증빙자료 요구 등 추가적인 확인 조치 없이 계좌를 개설해준 경우 이는 금융기관 업무 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라며 "신청인의 위계가 업무방해의 위험성을 발생시켰다고 할 수 없어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를 구성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반면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의 경우, 계좌 접근매체를 이용해 저질러지는 범죄를 구체적으로 인지하지 않아도 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는 전자금융거래에 쓰이는 체크카드 등 접근매체를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면서 대여·보관·전달했을 때 성립한다.

2심이 일부 무죄 판단을 내린 것은 A씨가 대여한 접근 매체가 어떤 범죄에 이용될 것이라고 봤는지 구체적으로 특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원은 "접근매체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 행위에 이용될 것을 인식했다면 전자금융거래법의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다'고 볼 수 있다"며 "접근매체를 이용해 저질러지는 범죄의 내용이나 저촉되는 형벌법규, 죄명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은 미필적 인식으로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범죄에 이용될 것을 알았는지는 접근매체를 대여하는 등의 행위를 할 당시 피고인이 가지고 있던 주관적 인식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되고, 거래 상대방이 접근매체를 범죄에 이용할 의사가 있었는지 또는 피고인이 인식한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고려할 필요는 없다"고도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계좌개설 시 예금거래신청서 등에 허위 사실을 기재했어도 업무 담당자가 추가적인 확인 조치 없이 계좌를 개설해 준 경우, 금융기관 업무 담당자의 불충분한 심사에 기인한 것"이라며 "계좌개설 신청인의 위계에 의한 업무방해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최초로 명시한 판결"이라고 덧붙였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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