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식품

'절대음감' 있지만 '절대미각' 없는 이유[이환주의 생생유통]

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9.28 13:30

수정 2023.09.28 13:30

6900만원 와인의 맛은 어떨까? : 2화 
[파이낸셜뉴스]
스페인 요리가게에서 먹은 새우 요리 / 사진=이환주 기자
스페인 요리가게에서 먹은 새우 요리 / 사진=이환주 기자

1병에 6900만원 하는 와인(DRC 로마네 꽁띠 그랑크뤼 2017)을 죽기전까지라도 맛볼 수 있을까? 평균 수명이 길어져 앞으로 70년을 더 살아도 기자의 인생에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 다만 100만원이 넘는 와인 2종을 먹었던 경험을 토대로 어디까지나 '사고실험'을 통해 그 맛을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마찰(저항)이 없는 곡면에서 구슬을 굴리면 영원히 등속도 운동을 할 것'이라고 가정한 것처럼 한 방울에 수만원은 족히 넘을 그 와인의 맛을 감히 상상해 보는 것이다.

설령 6900만원짜리 와인을 먹어본 사람이 그 맛을 말과 글을 통해 설명해 주더라도 그것을 맛보지 않은 사람 입장에서는 전혀 와 닿지 않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자전거 묘기 선수에게 자전거 타는 법에 대해 가르침을 받더라도 직접 자전거를 타보지 않으면 자전거 타는 법을 익힐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관찰(경험)'과 '전달'이지만 6900만원 와인의 맛이란 경험이 불가능할 것 같으므로 유추와 일반화를 통해 접근해 보기로 한다.


스타필드 하남 와인클럽 내부에 있는 와인랩의 후각 기기 모형 / 사진=이환주 기자
스타필드 하남 와인클럽 내부에 있는 와인랩의 후각 기기 모형 / 사진=이환주 기자

■'절대음감'은 있지만 '절대미각'은 없는 이유

6900만원 와인의 맛에 대해 논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맛'이라는 감각에 대해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맛'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후각이나 청각 등 다른 감각과 달리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에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음식에 대해 '맛있다'는 판단을 내릴 때는 시각, 후각, 촉각 등 다양한 감각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해 영향을 미친다.

흔히 말하는 와인을 '세 번에 먹는다'는 말도 맛의 이런 특징을 나타낸다. 눈(시각)으로 보고, 향기(후각)를 맡고, 그 다음에 맛(미각)을 본다는 뜻이다. 단지 수사적인 의미뿐 아니라 실제로도 맛은 다른 감각과 연동해 작동한다. 예를 들어 한 실험에서 피실험자의 눈을 가리고 후각을 마비시킨 상태에서 양파를 사과라고 속이고 먹게 하면 피실험자는 실제로 양파를 사과라고 착각하며 우걱우걱 씹어 먹기도 한다. 코로나19가 유행했을 당시 프랑스의 소믈리에들은 후각이 마비되면서 미각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져 직업을 잃는 것 아니냐는 걱정까지 했다고 한다. 이처럼 미각은 단일 감각이면서 복합 감각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매운맛은 실제로는 '맛'이 아니라 피부가 느끼는 '통각(촉각)'이다.

유튜브에 있는 눈과 코를 막고 사과와 양파를 구별하는 실험들.
유튜브에 있는 눈과 코를 막고 사과와 양파를 구별하는 실험들.

맛의 이런 복합적인 특징으로 인해 맛을 평가(리뷰)하는 사람과 그것을 듣는 사람 사이에도 커다란 간극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음악에는 '절대음감'이라는 게 있다. 세상의 모든 소리를 몇 개의 계이름으로 표현해 높낮이를 측정하고 공유할 수 있다. 하지만 맛의 영역에서 '절대미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리는 '파#'이 단 하나의 높이를 뜻하지만 맛에 있어서는 '브릭스 15(단맛의 단위)'가 수박의 단맛인지, 포도의 단맛인지 알 수 없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어린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라고 얘기한 것도 맛을 표현하는 방식이 어렵기 때문이다. 맛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방법 중에 하나는 '이미 존재하고 모두가 알고 있는 것과 빗대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장금 드라마의 한 장면. / 출처=유튜브 채널 '옛드 : MBC 레전드 드라마'
대장금 드라마의 한 장면. / 출처=유튜브 채널 '옛드 : MBC 레전드 드라마'

그리고 맛은 그 맛을 보는 사람의 기분, 같이 먹는 사람, 분위기 등에도 영향을 받는다. '원효대사의 해골물'이나 선조임금이 피난길에 먹었다는 '도루묵'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이는 자명하다. 20만원짜리 초밥 오마카세를 먹어도 신입사원이 회사 임원과 함께 먹는 것과 여자 친구와 기념일에 먹는 것은 맛의 차이가 극명할 것이다.

또 코카콜라와 펩시콜라의 블라인드 테스트, 비싼 가격표를 먼저 보고 마시는 와인의 맛에 대해 사람들의 맛 평가가 달라지는 것 등도 맛을 평가하는 사람의 심리 역시 아주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예를 들어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배우의 연기', '음악', '연출', '액션' 등 세부 요소를 평가하는 것은 쉽지만 그 영화의 전체를 놓고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판가름 하는 것은 굉장히 복잡한 요소가 작용하는 것처럼 어떤 음식에 대해 우리가 '맛있다', '맛없다'는 평가를 내릴 때는 매우 다양한 변수가 작용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음식을 먹을 때 그것을 단순히 '먹는다(마신다)'고 생각하지만 '맛을 본다'라는 행위는 그 음식을 준비하고, 이와 혀를 사용해서 잘게 부수고, 목구멍으로 넘기고, 소화시키는 모든 전후 과정과 맥락을 포함하는 아주 심오한 행동인 것이다.

강백호가 레이업 슛을 할 때 '왼손은 거들 뿐'이라고 한것처럼 음식을 맛볼 때 '혀는 거들 뿐'인 것이다.

■6900만원 와인은 절대로 분명히 맛있다
스타필드 하남 와인클럽 내부. /사진=이환주 기자
스타필드 하남 와인클럽 내부. /사진=이환주 기자

지난 5월 스타필드 하남 와인클럽에서 1병에 약 140만원 정도 하는 '샤또무똥로칠드 2009'와, 120만원 정도인 '샤또마고 2012'를 시음할 때였다. 기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별도의 비용을 내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약 20만원 정도를 결제해 실제로 해당 와인을 마시는 고객이 있었다. 이런 비싼 와인은 '도대체 누가, 왜, 먹는 것일까'란 궁금증이 일어 실례를 무릅쓰고 질문을 건넸다.

은발과 백발이 반쯤 섞인 중년의 남성은 "내 셀러에도 같은 와인이 있는데 이 와인을 딸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아 한번 시험삼아 맛을 보기 위해 마셔봤다"고 했다.

두 와인은 각각 소주잔 보다 작은 30mL를 마시는데 각각 6만원과 5만원 정도가 들었다. 그때 6900만원 와인의 맛에 대한 '유레카' 포인트가 찾아왔다. 아르키메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목욕탕을 뛰쳐나가고, 갈릴레오 갈리레이가 사고실험에서 마찰이 없는 곡면에 쇠구슬을 놓는 것처럼 6900만원짜리 와인의 맛이 내 뇌속의 매트릭스에 '찌릿'하고 전기 신호를 보내왔다.

아마도 6900만원짜리 와인의 코르크 마게를 따는 상황이란 이럴 것이다. 8월 한여름, 지중해나 카리브해의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초호화 요트에서 수영복을 입은 멋진 남녀가 핑거 푸드를 먹고 놀다가 저녁 노을이 질때 테이블에 얌전히 앉는다. 이후 양복과 넥타이를 갖춰 입은 소믈리에가 따라주는 6900만원짜리 와인을 먹게 되는 것이다. 소믈리에는 와인클럽 소비자가격 6900만원인 'DRC 로마네 꽁띠 그랑크뤼 2017'의 역사와 당시의 기후, 토양의 상태, 해당 와이너리의 전통에 대해 설명하고 먹기 전에 이 와인의 향과 맛에 대해 그럴듯한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와인의 가격에 부끄럽지 않을 만큼 비싼 잔에 졸졸졸 붉은 와인을 따르고 석양 빛에 와인의 붉은 빛을 견주어 보고 한 모금을 입안에 넣은 뒤에 오물오물 거리며 향과 맛을 느낀다. 그러다가 앞에 앉은 사람의 표정을 보고 천천히 목구멍으로 그 와인을 넘기는 것이다.


6900만원 와인의 마게를 따게 되는 'TPO(때와 장소 상황)'는 절대로 그 와인의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그런 환경일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베트남 나트랑의 한 크루즈 디너 모습 / 사진=이환주 기자
베트남 나트랑의 한 크루즈 디너 모습 / 사진=이환주 기자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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