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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와 나의 사적인 이야기: 5화 [이환주의 아트살롱]

이환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0.01 14:20

수정 2023.10.01 14:20

[파이낸셜뉴스]
일본 대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국내 판매가 시작된 지난 9월 6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특별 코너가 마련돼 있다. /사진=뉴스1
일본 대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6년 만에 내놓은 신작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국내 판매가 시작된 지난 9월 6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광화문점에 특별 코너가 마련돼 있다. /사진=뉴스1

2005년 1월, 해가 바뀌고 같은 대학의 수원캠퍼스에 다니는 그녀와 다시 만날 약속을 잡았다. 20여년 전의 일이라 정확하진 않지만 1월 5일, 수원경희대학교의 캠퍼스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수원캠퍼스에 간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굉장히 이상한 일이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했던 크리스마스 이브의 기억은 바로 얼마전처럼 생생한데, 막상 실제로 그녀를 만났던 그날의 기억은 매우 흐릿하다.


우리는 약속 시간에 약속한 장소에서 만났다. 그녀의 첫 인상은 수수하고, 차분하고, 작았다, 라는 느낌이었다.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캠퍼스 근처의 베트남 쌀국수 집에서 베트남 쌀국수를 먹었던 것 같다. 그녀는 내게 고양이 일러스트가 들어간 달력인가 다이어리를 선물로 줬었다. 우리가 처음 연락을 하게 된 것도 내가 교지에 '고양이를 좋아하세요?'란 소설을 썼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날 크리스마스 카드를 가져가서 그녀에게 건넸던 것 같은데 확실하지는 않다.

점심을 먹고는 수원캠퍼스의 중앙도서관에 함께 갔다. 수원캠퍼스의 중앙도서관에는 둥근 모양의 쇼파 같은 것이 있었는데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 책을 읽다 그녀는 피곤한 모양인지 잠깐 눈을 붙이고 조는 것 같았다. 스무살의 나는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찐따'였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음속으로 '역시나 내가 별로인가 보구나'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그녀에 대해 '첫눈에 반한다'고할 정도로 끌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오히려 다행일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다.

그날의 어색하고, 서툴렀던 첫 만남 이후에 나는 그녀를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로 약 10년 동안 단 한 명의 여자친구도 사귀지 못한채 서른 살이 된다.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을 열 가지 꼽으라면 그 중 한 가지는 스무살에 그녀와 단 한번의 만남으로 그 관계를 끝냈다는 것이다.

이제 마흔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 와서는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의미를 갖는 관계가 되는 것에 대해 그때와는 다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됐다. 스무살의 나는 연인 관계라는 것은 '심장이 터질 정도로 떨리고, 상대 앞에서면 내가 너무나 하찮은 존재인 것 같아 땅속으로 파고들고 싶어'라는 생각이 들어야만 되는줄로 알았다. 스무살의 나에게 지금의 내가 찾아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종종 처음에는 밍숭밍숭한 숭늉처럼 시작해 , 서로 조금씩 물들어 가는 그런 일도 있는 거야"라고 말해도 아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불은 뜨거운 거야"라고 아무리 말로 설명해줘도 그것을 직접 느끼기 전에는 절대로 뜨거움에 대해 알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스무살의 겨울이 지나고 3년이 지나 나는 우연히 그녀와의 일을 하나의 글로 다시 남겨 놓게 된다. 2008년, 당시 다니던 대학의 중앙도서관이 60주년 수기 공모전을 진행했는데, 나는 그녀와의 일화를 에세이로 써서 냈다. 제목은 '우연히의 결말이 '우연히' 좋을 확률'이었다.

하루키와 나의 사적인 이야기: 5화 [이환주의 아트살롱]

우연히의 결말이 '우연히' 좋을 확률

중앙도서관의 대출이력을 조회해 보았습니다. 2004년도 한 해 동안 제가 빌린 총 11권의 책 중 8권의 저자는 촌상춘수이거나, 무라카미 하루키이거나, 村上春樹였습니다. 사실 모두 같은 작가의 이름입니다. 저는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 하루키의 책을 처음 접했습니다. 서고의 문학 코너를 계획 없이 돌아다니다가 눈에 띄는 책을 집어 드는 평소의 습관대로 한 권의 책을 골랐고, 우연하게도 그때 제가 서 있던 곳은 일본문학 코너였습니다. 하지만 100권이 넘는 일본 소설 중에서 하필 하루키의 책을 선택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상실의 시대.’ 저는 분명 어딘가에서 그 책의 제목을 들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서고에 선 채로 저는 한 시간 가량 페이지를 넘겨 나갔고, 그다음 날 서점에서 같은 제목의 책을 샀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수업 교재를 제외하고는 처음 산 책이었습니다.

같은 해 겨울, 아직 대학 신입생이던 저는 크리스마스이브 날 오후 1시에 경희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한 여자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기다리는 사람이 여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고작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학교의 교지에 하루키의 문체를 흉내 내서 고양이에 관한 짧은 단편을 실었고, 며칠 후에 한 사람으로부터 이메일이 왔습니다. 그 후로 얼마간 서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문자를 나누다가 이브 날에 만나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1시가 되자 도서관에 도착했다는 문자가 왔고, 저는 그 사람이 얘기해 준 풀색 목도리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한참을 찾아봐도 찾을 수 없었기에 저는 전화를 했습니다. 처음으로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저도 처음으로 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어디에 있느냐고. 입구에 있다는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도 지금 입구 앞이라고 말했습니다. 한동안 조용히 생각하고 다시 물어봤습니다. 혹시 수원에 있느냐고. 여자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둘 다 도서관 앞에서, 같은 시간에 서로 상대방을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재미있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로 “언젠가 인연이 있으면 다시 만나요.”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양쪽 모두의 손에 전해주지 못한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이 들려있었고, 제 가방 속에는 아직 쓰지 않은 크리스마스 카드 두 장과 검은색 볼펜 2자루가 들어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상실의 시대’를 검색해 봤습니다. 그리고 상실의 시대에 남겨져 있는 서평을 봤습니다. '서평. 이라기보다 저의 주저리입니다만, '이란 문장으로 그 서평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참 상투적이고 / 우스운 흑백논리의 힘을 빌리자면, / 사람은 / 친구가 될 수 있는 사람과, /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으로 /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 적어도 / 나의 친구는 / 상실의 시대를 읽고 / 허무함을 알고 /외로움을 알고 있는 사람이기를 / 희망합니다.’

‘아무도 글을 남겨놓으시지 않았기에, / 흔적을 처음으로 / 제가 영광스럽게 남깁니다. / 그 누가 알겠냐만은 / 나 아닌 그 누가 이 사실을 알겠냐만은 / 참 자랑스럽습니다.

2005년 10월에 작성된 서평이었습니다. 서평의 작성자는 우연히도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004년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는 그 사람과 만나려고 했었습니다. 몇 년이나 전의 일이긴 하지만 분명히 저는 이 흔적을 남긴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남긴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2004년에 만나지는 못했지만 저는 그 사람과 다음 해 1월에 한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원에 있는 경희대학교의 도서관에서. 하지만 그 사람과 친구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대학 신입생 시절의 저는 상실의 시대를 읽고, 외로움도 느끼고 있었지만 너무나 서툴렀습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신간이 없다는 건 알지만 요즘에도 도서관에 가면 때때로 일본문학 코너를 서성이게 됩니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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