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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와인의 진한 아로마… 눈앞에 '미켈란젤로 언덕'이 펼쳐졌다[김관웅의 도슨트 Wine]

김관웅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1.17 04:00

수정 2023.11.17 04:00

'바디아 아 파시냐노'
라벨 속 伊 파시냐노 대수도원 갈릴레이가 수학 가르쳤던 곳
지식·미식 갖췄던 수도사들은 그곳서 최고의 와인 만들어내
오늘날 '블렌딩' 기법도 고안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노을이 아르노강을 휘감아 흐르는 피렌체 시내를 물들이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가운데)과 팔라초 베끼오 탑 등이 아련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바라본 노을이 아르노강을 휘감아 흐르는 피렌체 시내를 물들이고 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가운데)과 팔라초 베끼오 탑 등이 아련한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활동했던 이탈리아 아시시 성당과 수도원 모습.
프란치스코 성인이 활동했던 이탈리아 아시시 성당과 수도원 모습.
이탈리아 와인명가 안티노리(Antinori)가 토스카나의 끼안티 클라시코에서 만드는 '바디아 아 파시냐노(Badia a Passignano)'
이탈리아 와인명가 안티노리(Antinori)가 토스카나의 끼안티 클라시코에서 만드는 '바디아 아 파시냐노(Badia a Passignano)'
"이탈리아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 올라본 적 있나요. 피렌체를 감싸 흐르는 아르노 강과 우뚝 솟은 피렌체 두오모 돔을 발갛게 비추는 석양이 너무도 멋진 곳입니다. 해가 진 후 아르노 강변을 따라 하나둘씩 켜지는 주광색 조명은 어느새 먼발치의 사람들을 중세속으로 이끌고 들어갑니다.
"잘 오셨습니다. 여기는 피렌체 공국입니다."

며칠 전 그런 와인을 만났습니다. 이탈리아 와인명가 안티노리(Antinori)가 토스카나의 끼안티 클라시코에서 만드는 '바디아 아 파시냐노(Badia a Passignano)'입니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잔잔하게 입속을 물들이는 아로마가 마치 피렌체 시내를 포근히 덮는 미켈란젤로 언덕 노을을 닮았습니다. 또 와인이 입속에서 사라질때면 진한 아로마에 가려있던 여러가지 부케가 서서히 안개처럼 피어납니다. 무심코 오래된 성당 한켠의 대리석을 쓰다듬을 때 켜켜이 쌓인 삶의 흔적을 차례차례 마주하는 그런 느낌이랄까요. 바디아 아 파시냐노는 안개가 살짝 내려앉은 중세의 어느 골목길을 걷는 그런 감동을 주는 와인입니다.

#1.수도사는 최고의 지식인이자 뛰어난 미식가

바디아 아 파시냐노는 '파시냐노 대수도원'이라는 뜻입니다. 파시냐노 수도원은 891년, 멀게는 395년에 세워졌다고 알려진 아주 오래된 수도원입니다. 만일 그 역사의 기원이 395년이라면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가 죽던 해입니다. 테오도시우스는 392년 가톨릭을 로마의 국교로 선포해 오늘날의 기독교를 있게 한 위대한 황제입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 로마는 자식들에 의해 동서로 완전히 갈라지며 서양사의 물결이 바뀌게 됩니다. 파시냐노 수도원은 이후 1049년에 베네딕토 수도회 산하로 편입됐으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1587년부터 2년간 수도회 수학교사로 머무르기도 했던 유서깊은 수도원입니다.

예부터 수도원 인근에서는 늘 좋은 와인이 났습니다. 성찬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와인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죠. 오래된 수도원 인근에 늘 포도밭이 있는 이유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직접 포도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던 중세 수도사들이 그 시대의 최고 엘리트 집단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독한 문맹사회였고 문맹을 장려하던 기독교 문화권에서 수도사들은 유일하게 문자를 아는 뛰어난 지식인이자, 농부이고, 미식가였습니다. 이들은 어떻게 하면 맛있는 포도를 얻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와인이 맛있어지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 노하우는 후배 수도사들에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수도사들은 같은 포도밭, 같은 품종의 포도인데도 밭고랑마다 서로 다른 맛을 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형에 따라 토양의 성분과 퇴적층이 서로 다를 수 있고, 건물이나 나무에 의해 일조량과 바람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사진 밭의 경우 그 위치에 따라 포도 맛이 확연하게 차이가 납니다. 수도사들은 이런 미묘한 차이를 일찍부터 알았습니다. 그래서 돌로 야트막한 담을 쌓아서 구분해놨습니다.

프랑스 와인, 특히 부르고뉴 와인을 보면 라벨에 '끌로(Clos)', '뀌베(Cuvee)' 등의 단어들을 본적이 있을 겁니다. 끌로는 바로 수도사들이 쌓아놓은 그 '돌담'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도 이 돌담에 따라 포도맛이 정확하게 달라진다고 합니다. 혹시 지금 마시는 와인의 라벨에 끌로라는 단어가 있다면 수도사들의 오랜 노하우가 담긴 좋은 와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수도사들은 같은 밭이라 하더라도 포도를 밭고랑별로 구분해 수확하고 과즙도 분리해서 짜냈습니다. 이후 와인 맛을 보며 다른 밭고랑의 와인을 섞었습니다. 이렇게 제조된 와인은 훨씬 복합적인 맛을 내고 늘 일관된 품질을 유지했습니다. 이같은 방식을 '뀌베 시스템(Cuvee System)'이라고 합니다. 뀌베는 프랑스 부르고뉴나 상파뉴에서 포도를 수확해 압착했을 때 처음 나오는 좋은 과즙을 말합니다. 그 해 농사가 너무 가물었다면 경사진 포도밭의 위쪽에 위치한 포도는 물이 부족해 품질이 떨어지지만, 맨 아랫쪽 포도는 품질이 좋습니다. 물이 위에서 흘러 아랫쪽에 모이기 때문이죠. 반대로 비가 많이 온 해라면 아랫쪽 포도는 물을 많이 머금어 맛이 흐린 반면 위쪽은 과즙 농도가 아주 높습니다. 그래서 각 고랑마다 포도맛을 보고 이를 섞는 것이죠. 이 뀌베 시스템도 수도사들이 처음 고안한 블렌딩 기법입니다.

보르도에서는 각 품종 별로 비율을 정해 섞습니다. 또 상파뉴에서는 샴페인을 만들 때 여러 해 동안 만들어진 와인을 섞습니다.

#2. 중세 식탁과 세계사 물줄기 바꾼 금식일

신앙이 지배했던 중세 가톨릭 세계는 금식일에 지방 섭취를 철저하게 금지했습니다. 육고기는 물론이고 부산물인 유제품, 달걀까지도 제한했습니다. 더운 성질을 가진 붉은색 고기가 성욕을 부추긴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정 음식을 하루이틀 못먹는 것은 참을 수 있겠지만 금식일은 그 기간이 너무 길고 자주 찾아왔습니다. 사순절은 장장 6~7주일에 달했고, 매주 금요일과 각종 축일까지 합치면 1년 중 거의 절반에 가까운 140~160일이 금식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축제를 의미하는 '카니발(Carnival)'도 금식일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기는 사순절 시작에 앞서 육고기를 맘껏 먹으며 거리 축제를 즐기던 풍습이 오늘날 카니발로 자리잡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금식일이라 하더라도 생선은 먹을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기 때문에 성질이 차고, 살의 색깔도 흰색이었기 때문에 비늘이 없는 뱀장어, 메기 등을 제외한 생선은 모두 허용했습니다. 중세 수도원을 방문하면 어딜가나 양식장 시설이 있는 이유입니다.

당시 서민들은 금식일에 민물고기를 먹었습니다. 구하기 쉬운데다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귀족이나 부자들은 바닷고기를 즐겼습니다. 바닷고기는 대부분 크고 기름기가 있어 지방에 목마른 귀족들을 입맛을 부족하나마 사로잡을 수 있었습니다. 바닷고기는 대구를 좋아했습니다. 대구를 좋아했다기보다는 유럽이 접한 대서양은 대구가 정말 크고 많이 잡혔습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비롯한 연안 국가들이 주식처럼 즐기는 '바깔라우(Bacalhau)'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이처럼 중세 식탁을 바꾼 금식일은 세계사 물줄기도 바꿨습니다. 연근해에 머물던 당시 선원들이 대구를 잡으러 큰 바다로 나가기 시작하면서 대항해시대를 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나가다보면 어느 순간 절벽처럼 떨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스크 지역 선원들은 용감하게도 대구를 잡기 위해 아메리카 대륙의 뉴펀들랜드 연안까지 나가면서 먼 바다를 개척하기 시작합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대항해 시대를 먼저 연 이유입니다.

#3. 중세 골목길로 안내하는 바디아 아 파시냐노

'바디아 아 파시냐노 2016'을 조심스럽게 따라 봅니다. 진한 포도향이 순식간에 주변을 장악합니다. 신선하고 고급스런 아로마가 일품입니다. 마주하기 전 4시간 전에 보틀 브리딩을 하고, 다시 1시간 정도 디캔터에서 브리딩을 거쳐 병에 다시 담는 더블 디캔팅을 했는데도 그 향이 폭발적입니다.

입안에 살짝 흘려보면 제법 묵직한 질감에 놀랍니다. "어? 산지오베제(Sangiovese) 와인 맞나"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입니다. 미디엄 바디와 풀바디 사이에 있지만 풀바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입속에서 마주하는 첫 아로마는 붉은 색 과일입니다. 입안에서 와인이 사라질때쯤 치솟는 침이 고일 정도의 기분좋은 산도가 인상적입니다. 산지오베제 100% 와인 맞네요. 이어 낙엽, 가죽, 연필심, 흙내음 등 복합적인 부케가 입안을 맴돌고 난 뒤 혀와 입안에 소복소복 내려앉는 타닌은 정말 좋습니다. 7년이 지난 와인임에도 타닌은 아직 두껍습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타닌도 아주 잘게 쪼개져 살포시 스며들 것 같습니다.


구조감 좋은 와인은 이런 감동을 줍니다. 눈을 감고 다시 한 모금 머금습니다.
이 와인, 라벨을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피렌체 노을 빛을 닮은 바탕에 흐릿하게 자리잡은 바디아 아 파시냐노 수도원 건물, 저는 어느새 그 앞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kwkim@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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