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일반경제

[길 잃은 방폐장] (下) 남은 기간은 7년, 원전 가동 중단 우려 한국

이유범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2.17 16:14

수정 2023.12.18 07:27

[파이낸셜뉴스] 원전을 운용 중인 주요 국가들이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사용후핵연료)을 처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여전히 답보 상태다. 지난 40여년간 9차례의 부지선정 과정이 실패하면서 21대 국회는 '고준위 방폐물 관리 특별법(이하 고준위 특별법)'을 만들어 처리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야간 이견에 지난 11월 22일 있었던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법안소위는 고준위 특별법 심의를 처리하지 못했다. 현재 고준위 특별법은 여야가 12월 임시국회에서 신속처리를 원하는 법안리스트에 포함된 상태다. 만약 여야가 12월 중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향후 원전 가동은 물론 전력수급에까지 차질을 빚게 될 전망이다.

'탈원전' 잔상에 고준위 특별법 '표류'

17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국민의힘 유의동 정책위의장과 이양수 원내수석부대표, 더불어민주당 이개호 정책위의장과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오는 19일 국회에서 '2+2 협의체' 3차 회의를 열고 양당이 12월 임시국회 최우선 처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법안을 논의할 예정이다.
이날 논의될 법안에는 국회 산업위가 처리하지 못한 '고준위 특별법'도 포함된 상태다. 고준위 특별법이 상임위를 떠나 여·야 지도부의 손으로 넘어간 만큼 다소 진전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가운데 비관적 전망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자칫 12월 중 통과가 불발되면 4월 총선을 앞두고 여·야 모두 부담으로 작용해 사실상 자동폐기 절차를 밟게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당초 고준위 특별법은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의원이 먼저 발의했고, 이어 국민의힘 이인선·김영식 의원이 특별법안을 추가로 발의해 국회에서 3가지 안을 병합 심의해 왔다. 그간 여·야의 노력으로 고준위 특별법의 쟁점은 대부분 해소됐고 '관리시설 확보 목표 시점 명시 여부'와 '부지 내 고준위 방폐물 저장시설의 최대 저장 용량 설정 기준' 등 2개의 핵심 쟁점만 남겨 둔 상태다.

민주당은 원전 내 저장시설 규모를 원자로 '설계수명' 기준 발생량으로 엄격히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을 고수하고 있다. 민주당이 이같은 의견을 고수하고 있는 것은 법안 발의 목적이 국민의 힘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당초 김성환 의원의 발의안은 2021년 9월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따라 기존 원전의 '질서있는 퇴장'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친(親)원전으로 에너지 기조가 바뀌자 입장이 바뀌었다. 탈원전을 전제하지 않은 영구 방폐장은 원전의 계속 운전과 신규 건설을 오히려 뒷받침할 수 있다고 민주당측이 계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쌓여가는 고준위 폐기물...전력 생산 차질 우려

이처럼 여야가 고준위 특별법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갈 곳 없는 사용후핵연료는 쌓여가고 있다. 1978년 고리원전이 상업운전을 시작한 이래 45년간 원전 내 임시저장시설에 쌓여 있는 사용후핵연료는 1만 8600t에 달한다.

문제는 7년 뒤인 2030년부터 순차적으로 임시저장시설이 포화 상태에 이른다는 점이다. 예상 포화 시점은 2030년 한빛원전, 2032년 고리원전(조밀저장대 적용 시), 2037년 월성원전 순이다. 이대로는 원전 가동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점에서 중간 저장 시설과 영구 처분 시설을 지을 부지 선정과 공사 착수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원전 운영에 차질이 생기면 전력 수급 상황에 영향을 미친다.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2030년에는 원전 발전량이 전체 발전량의 32.8%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력 생산의 한 축을 맡고 있는 화석연료를 이용한 전력생산도 줄여야 하는 것을 감안하면 원전 가동 차질은 치명적이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지난 13일(현지시간) 끝난 제28차 유엔기후변화협약에서 당사국들은 2050년까지 탄소중립(넷제로)을 달성하기 위해 "2030년까지 공정하고 질서정연하고, 공평한 방식으로 에너지 체계에서 화석연료에서 벗어나는 전환을 개시할 필요가 있다"고 규정했다. 향후 무탄소 전원인 신재생에너지와 원전이 공존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방폐장 없으면, 원전 수출 걸림돌

고준위 방폐장 건설이 미뤄질 수록 우리 정부가 추진 중이 원전 수출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2022년 친환경 투자기준인 녹색분류체계(taxonomy·택소노미)에 원전을 포함하면서 여러가지 단서 조항을 달았다. 그 중 하나가 "모든 원전은 중·저준위폐기물 처분을 위해 운영 가능한 처분시설을 갖춰야 할 뿐 아니라 2050년까지 고준위폐기물을 처리하는 처분장을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준위 특별법이 통과돼야만 EU회원 국가에 원전 수출이 용이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는 현재 UAE 원전 수출을 토대로 이집트, 루마니아에 이어 폴란드, 체코 등으로 진출을 추진 중이다. 가장 강력한 경쟁국가는 프랑스의 EDF이다.

프랑스는 고준위 방폐장 건설과 관련해 우리나라보다 한참 앞서 있다. 고준위 방폐장과 관련한 계획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해외 원전 수출은 어려워진다는 설명이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이르면 2030년 한빛 원전을 시작으로 사용후 핵연료를 저장하는 습식 저장조의 포화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며 "이번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으면 전력 수급은 물론 원전 지역주민들의 불안감 해소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leeyb@fnnews.com 이유범 기자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