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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팬 톡] 일본제철에 먹힌 US스틸

김경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12.19 18:17

수정 2023.12.19 18:17

김경민 도쿄특파원
김경민 도쿄특파원
"새 시대를 향한 글로벌 네트워크를 완성하고 일본의 성장잠재력을 되찾겠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사장은 미국 산업화의 상징인 US스틸 인수를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인수금액은 141억달러(약 18조3000억원)로 일본제철의 역대 인수합병(M&A) 중 최대 규모다.

피츠버그에 본사가 있는 US스틸은 지난 1901년 존 피어몬트 모건이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의 카네기스틸을 사들여 세운 회사다. 업력만 무려 122년이다.

이 카네기스틸에 페더럴 스틸 컴퍼니, 내셔널 스틸 컴퍼니가 합병하면서 US스틸이 탄생했다.
세계 최대 철강회사가 된 US스틸은 사상 처음으로 기업가치 10억달러를 돌파한 회사로도 유명하다.

회사의 전성기였던 1943년 직원 수는 34만여명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삼성전자(27만여명)보다 직원 수가 많으니 당시 얼마나 잘나갔는지 짐작이 된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일본, 독일, 중국 등에 밀려 점점 주도권을 내주기 시작했다. 급기야 최근의 글로벌 업계 순위는 27위까지 고꾸라졌다.

기업가치도 계속 쪼그라들었다. 한때 시가총액 세계 1위였던 US스틸은 2014년 미국 주요 500개 대기업으로 구성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지수에서도 쫓겨났다.

일본 현지에선 이번 M&A를 두고 '오랫동안 유지됐던 미일 간 세계 철강업계의 구도가 재편된 대형 사건'이라고 떠들썩하다. 그동안 미국은 일본 철강업체들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가장 중요한 고객인 완성차 업체가 수익의 기둥이지만 미국은 진입이 좀처럼 쉽지 않은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엔 2가지 큰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하나는 지독한 보호무역주의였고, 다른 하나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운송비용이었다.

미국 철강업계의 보호무역주의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1990년대 말 아시아 외환위기의 영향이 컸을 때 이들은 반덤핑소송을 제기하고 다른 나라의 철강 제조를 철저히 거부했다. 최근에는 생산능력을 급속히 확대하고 있는 중국이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도 여전히 리스트에 올라가 있긴 마찬가지다.

지리적 장벽도 크다. 완성차 업체와 같은 고객사가 많은 디트로이트 등 미국 동부에 수출을 하기 위해선 파나마운하를 통과해야 하는데 운송비가 비싸다. 그런데 US스틸의 주요 기지는 디트로이트 인근 오대호 해안에 있어 일본 기업 입장에선 여러모로 쓰임새가 많은 것이다.

US스틸을 인수해 이런 장벽을 뛰어넘겠다는 게 일본제철의 복안일 것이다. 일본제철의 지난해 조강 생산량은 4만437만t으로 세계 4위였다. US스틸을 인수하면 곧바로 3위로 부상한다. M&A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그려진 세계 철강 거대기업의 지도가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이번 인수는 일본 기업이 미국에서 상당한 제조 입지를 구축하는 전략적 변화를 의미한다. 또 철강산업은 국가정책과 맞물려 있는 만큼 미일 간 국제 무역과 산업 관계의 재정립은 물론 세계 철강시장의 새로운 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US스틸의 흥망성쇠는 100년 기업을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 US스틸의 전성기였던 1943년부터 회사가 무너져 팔릴 때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80년에 불과했다.
당대 최고의 기업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혁신이 끊기면 빠르게 망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산업계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도 이제 대기업을 중심으로 100년 기업을 목표로 하는 곳이 많아지고 있다.
글로벌 장수기업이었던 US스틸의 몰락은 100년 기업이 10곳 남짓인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km@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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