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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옛 신문광고] 비리로 무너진 ‘새나라’

손성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04 18:47

수정 2024.01.04 18:47

[기업과 옛 신문광고] 비리로 무너진 ‘새나라’
"새 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로 시작되는 '새 나라의 어린이'는 1945년 광복 직후 발표된 윤석중 작사, 박태준 작곡의 동요다. 광복의 기쁨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이 담긴 노래다. '새 나라'라는 이름은 17년 뒤 국민의 시선을 끌었다. 1962년 8월 27일 오후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인천 청천동에서 '새나라자동차' 공장 준공식이 열린 것이다. 고속도로도 없던 시절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김현철 내각수반 등 국가 수뇌부가 험한 길을 달려와 총출동한 국가적 행사였다. 박정희는 준공식에서 "우수한 자동차를 우리 손으로 만들어 외화를 절약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광복 이후 한국의 자동차산업계에는 시발자동차와 하동환자동차가 있었지만, 미군 지프 엔진을 활용해 차량을 제작하는 원시적 수준이었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 승용차 수는 9000여대에 불과했다. 자가용은 꿈도 꾸지 못할 때라 수요가 많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인구에 비해 자동차는 너무 적었다. 박정희는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을 세워 자동차를 국가 기간산업으로 키우려 했다. 그해 2월 새나라자동차는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협약을 체결했다. 수교 전이었지만 일본의 기술과 제품은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텔레비전 등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화장품 등 소비재도 많았다. 자동차도 현대적 제조기술이 없어 일단 일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부터 시작하고자 만든 회사가 새나라자동차였다.

인천 부평구는 한국 자동차산업이 태동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국산자동차회사'라는 일본 이스즈의 자회사가 군용 차량을 제조할 목적으로 설립됐는데, 새나라자동차가 그 땅을 이어받았다. 새나라자동차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대우자동차(현 한국지엠)의 뿌리가 된다. 현재 한국지엠 부평공장 부지가 바로 새나라자동차 공장 터였다. 인천이 현재 자동차기업뿐만 아니라 부품 업체와 중고차 시장이 몰려 있는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가 된 데는 이런 역사적 연유가 있다. 서울과 가까운 항구도시라는 이점이 작용했다.

새나라자동차가 조립생산한 승용차는 배기량 1200㏄급 닛산의 1세대 '블루버드'였다(경향신문 1962년 7월 4일자·사진). 반제품을 수입해 조립하는 SKD(Semi Knock Down) 방식으로 제조했다. 현재 닛산은 프랑스의 르노, 일본의 미쓰비시와 지분을 공유하며 협업 관계를 유지하며 판매량 기준으로 도요타, 폭스바겐, 현대차에 이어 세계 4위권 자동차기업에 올라 있다. 닛산의 한국 자동차기업과의 관계는 로노삼성(현 르노 코리아)이 닛산의 '맥시마'를 'SM5'라는 이름으로 국내에서 생산·판매함으로써 30여년 만에 복원됐다.

새나라자동차는 비록 조립이었으나 대량생산 체제를 갖춘 한국 최초의 현대적 자동차기업이었다. 그러나 새나라의 운명은 일찍 종말을 고했다. 자동차 산업 육성이라는 목표는 뒤로한 채 정부는 비리를 자초했다. 박노정이라는 재일동포에게 사업권을 준 것부터 잘못이었다. 박노정은 공장이 완공되기도 전에 블루버드 완제품을 400대나 관광용 명목으로 들여왔는데, 정부는 이를 택시로 전환해 주어 반발을 샀다. 관세 등 세금을 면제받았고 폭리를 취해 특혜 시비와 탈세 의혹이 불거졌다.

벌어들인 자금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쓰인 것으로 나중에 밝혀져 파문은 더욱 커졌다. 외환사정까지 나빠지면서 사업을 지속할 수 없었다.
새나라자동차는 출범 1년도 안 된 1963년 7월에 문을 닫았고, 2년 후 신진공업으로 넘어갔다. 세련된 일제 승용차를 시발자동차가 이길 수 없었다.
비록 망치로 드럼통을 두드려 차체를 만드는 기술 수준이었어도 자생력을 키워 가던 토종 자동차기업까지 새나라 파동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tonio66@fnnews.com 손성진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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