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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 톡] 대만과 중국 사이

이석우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23 18:21

수정 2024.01.23 18:21

이석우 베이징특파원·대기자
이석우 베이징특파원·대기자
중국인 지인이 몇 년 전 미국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했다가 생긴 일을 최근에 털어놓았다. 대만에서 온 젊은 학자를 보고 손을 내밀며 "중국 사람이시죠. 저는 베이징에서 왔어요"라고 말을 건넸다가 무안을 당했다는 것이다. 상대방은 냉랭한 태도로 "대만 사람인데요"라며 외면하더라는 것이다. 대만인과 중국인을 동일시하는 대륙의 중국인. "중국인이 아니오"라는 대만인. 양안 사이에 팬 깊은 골을 보는 듯했다.

지인의 이야기를 듣자니 대만 허우샤오셴 감독의 1989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비정성시'(A City of Sadness)가 떠올랐다. 일제의 패망과 국민당 통치, 1947년 2·28사건의 격동 속에서 유복했던 한 가족이 비극에 휘말리는 비정한 대만 현대사의 상실과 아픔을 그렸다.


1945년 8월과 1948년 여름 사이. 상인 린아루는 일제와 국민당, 국민당을 따라 들어온 상하이 조폭들에 의해 재산과 세 아들을 차례차례 잃는다. 남은 아들은 국민당 군대의 고문에 미쳐버리고 영화는 해방둥이 손자, 며느리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넋 나간 듯 저 멀리를 응시하는 린아루의 모습으로 마무리된다.

린씨 가족처럼 토착 대만인에게 국민당은 이전 지배자들보다 더 폭압적인 외세였다.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서 명나라 유민과 만주족의 청나라, 일본과 국민당까지 쉴 새 없이 지배자가 바뀌어 온 대만섬. 민초들은 내가 누군인지를 확인할 겨를도 없이 지배자에 억눌려 순응하며 숨죽인 채 살아가야 했다.

그런 민초들이 정체성 찾기를 시작한 것은 민주화운동이 확산된 1980년대부터였다. 정체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정치뿐 아니라 문화 전반에 걸쳐 이뤄졌다. '비정성시'도 그런 흐름 속에 나왔다. 이런 모색은 재야 변호사 천수이볜을 두 차례 총통에 당선시켰고, 역사 재해석 등 사회 전반의 변화를 가져왔다.

민진당 라이칭더의 지난 13일 총통 당선도 이 같은 변화의 연장선에 있다. 지난 16일 퓨리서치는 "대만인 중 3%만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겼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반면 67%가 (중국인 아닌) 대만인이라고 답했고, 28%는 대만인이면서 중국인이란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앞서 지난해 6월 대만정치대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1992년 같은 대학 조사에서는 대만인이란 대답은 10%를 겨우 넘었고, 30% 가까이는 자신을 중국인으로 여겼다. '대만인이면서 중국인'이란 답변은 50% 가까이 됐었다. 200만명이 넘던 국민당 계열 대만 이주 1세대들은 이제는 역사가 됐고, 그들의 자손도 중국인이란 정체성이 옅어졌다.

대만의 다수는 선거에서 흡수통합을 밀어붙이는 중국에 확실한 메시지를 전했다. 1980년대 대만에 유학했던 지인들은 "최근 대만에 가면 완전히 달라진 세상을 만난다"면서 "베이징 표준어 대신 민난어 방언만 들린다"고 전했다.

반면 대만에 대한 중국의 집착과 갈구는 더 불이 붙었다. 국력신장과 애국주의 고조는 대만 합병 열기를 지폈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필요조건에도 대만 통일이 들어갔다. 스토커를 피하듯 멀어지려는 대만과 집 나간 아이를 찾으려는 듯 필사적인 중국. 더 뒤틀려 가는 균열은 지층을 뒤흔들고, 쓰나미가 밀어닥치고, 당장이라도 화산이 분출될 형세다.

전략적 가치가 더 높아진 인도태평양전략의 핵심 파트너인 대만의 중국화를 미국이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2025년부터 중국이 역내 군사력에서 미국의 억제력을 압도할 것이란 평가는 중국에 거부하기 어려운 유혹이다. 양안 충돌은 주한미군의 개입을 피하기 어렵고, 동북아 물류의 70% 이상이 지나는 대만해협의 마비로 이어진다.
우리의 번영과 안정은 위태로운 지정학적 대결구도와 인화성 강한 과열 민족주의의 교직 속에서 어려운 줄타기를 하고 있다.

june@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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