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계산해서 안 되면 상상해라

안승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1.31 18:30

수정 2024.01.31 18:30

안승현 경제부장
안승현 경제부장
정확히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한 유명 예능프로그램에서 여자 방송인이 자신과 남편은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다른 패널들이 국가 출산율 등등을 언급하자 그녀는 "국가정책의 목표수치 달성을 위해 내가 아이를 낳을 순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이를 키우는 기쁨은 영원히 알 수 없겠지만, 부부가 둘만 살아가는 재미를 택했다"고 얘기했다.

감정적 너스레를 걷어내고 들어 보면 어디 하나 틀린 곳이 없는 말이다. 나라의 장래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를 사람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 과거에는 결혼을 해야 하는 혼기가 존재했고, 당연히 아이를 낳아 후사를 잇는 것이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여졌지만 지금은 각자 개인의 선택이 된 지가 오래다.
결혼이 개인의 삶에 손해를 끼친다면 안 하는 것이고, 출산 이후 어려움이 더 커진다면 이것도 선택할 수 있는 문제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니 인구소멸을 받아들이자는 게 아니다. 여기서 바로 국가의 책임이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이 더 큰 혜택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게 나라가 할 일이다.

얼마 전 이제 막 결혼을 했거나 신혼 시기를 보내고 있는 젊은 기혼자들을 만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모두 한목소리로 아이를 낳고 안 낳고를 가르는 중요한 조건은 바로 주거문제 해결이라고 입을 모았다. 아이보다 집이 먼저라는 얘기다. 집이 없는 상태로 육아를 시작할 경우 둘 다 제대로 이루지 못할 것이 자명한데, 그럴 바에야 집을 먼저 사고 육아를 생각해보겠다는 얘기다.

결혼과 출산 문제는 단순히 돈이 없다거나 고된 육아에 대한 두려움, 개인주의적 성향 등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경제 문제다. 그간 정부가 내놓은 수많은 출산 당근책들이 당장 결혼을 앞둔 당사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던 것은 진짜 필요한 것은 죄다 비켜 나가 있어서다.

신혼부부 주거지원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닌데 솔직히 말해 '이자 싸게 돈 빌려줄 테니 어디 좋은 데 집 구하세요' 정도가 대부분이다. 결국 빚낼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부모님 도움이 없이 온전히 두 사람 힘으로 시작해야 하는 부부에게는 출산과 육아를 결심할 만큼 크게 매력 있는 지원방안이 아닐 수 있다.

코로나 이전까지는 정부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지원금을 뿌린다거나, 한 명당 얼마씩 생계보조금을 준다든가 하는 일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이런 게 현실이 된 시대를 살고 있다. 공공요금이 올라 손해를 본 소상공인에게는 요금을 면제해주고, (여기에 동의하느냐와 관계없이) 소상공인들이 어려울 때 돈을 빌렸는데 지금 갚기 어렵다고 하면 시원하게 상환도 연장해주는 세상이다.

인구 문제는 앞서 나열한 것을 '압살'하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데, 이 정도면 신혼부부 대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결혼하면 원룸, 아이 한 명 낳을 때마다 수도권에 투룸·스리룸 아파트를 무상공급하겠다는 수준의 대책은 나와야 그나마 당사자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을까.

지난해 아이를 낳으면 승진 혜택을 주겠다는 회사가 등장해 화제가 됐다. 몇몇은 이를 놓고 희화화하기도 했지만, 그렇게만 볼 문제가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구 문제에 직면했던 일본에서는 돈벌이가 시원치 못한 남자들이 연애를 못하는 게 문제이니 국가가 능력 없는 남성들의 월급을 보전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까지 나왔다.


수십년간 전문가들이 모여 인구문제 해결을 위한 고담준론을 펼쳤지만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창의성 없이 계산기만 두들겨서는 획기적 전환점을 마련하기 어렵다.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상상을 안 했다면 비행기를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성과 없는 정책만 반복하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황당한 상상이라도 해봐야 하는 시기가 아닐까.

ahnman@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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