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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분방한 나나, 상처받은 여성들을 보듬다 [Weekend 문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2.02 04:00

수정 2024.02.02 04:00

세계 최고 조각가와 K-조각
(18) 누보레알리즘 대가 니키 드 생팔
'가부장제 대한 분노’ 작품에 고스란히
왜곡된 사회 통념으로부터 여성 해방
니키 드 생팔 'Hon(She)’
니키 드 생팔 'Hon(She)’
자유분방한 나나, 상처받은 여성들을 보듬다 [Weekend 문화]

풍만한 양감과 화려한 색채의 여인상 '나나' 시리즈로 잘 알려진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1930~2002·사진)의 작업 세계는 1960년대 초 '누보레알리즘' 경향의 아상블라주(폐품 등 다양한 사물을 한데 모아 미술작품을 만드는 기법)로 시작됐다.

'내 연인의 초상'(1961)은 그 무렵 제작한 것으로 누보레알리즘의 특성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생팔은 검은색 넥타이를 맨 남성 셔츠로 사람 형상의 포즈를 만들어서 못으로 고정시켜 걸고 얼굴 위치에 동그란 다트 판을 붙여 연인의 초상을 형상화했다. 게다가 부조 형식의 이 작업은 다트를 던지는 퍼포먼스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누군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힘껏 다트를 던졌을 때, 다트 판에 미리 붙여놓은 작은 물감 주머니들이 터지면서 다트 판과 흰색 셔츠는 금세 물감 얼룩으로 더럽혀진다. 생팔의 이러한 초기 작업은 누보레알리즘이 함의한 예술에 대한 아방가르드적 전위성과 맞닿아 있지만, 동시에 여성으로서 직접 겪었던 가부장제 질서의 강요와 폭력에 대한 강한 분노가 드러나 있다.


'내 여인의 초상'에서 다트를 던지는 공격적 퍼포먼스를 통해 사방으로 물감을 퍼뜨렸던 행위는 이후 '슈팅 페인팅' 시리즈로 이어져 본격화됐다. 생팔은 텅 빈 캔버스나 색이 없는 흰색 조각처럼 석고와 안료를 굳혀 평면 혹은 입체 형상을 만들어서, 그것을 향해 총을 겨누는 퍼포먼스를 수행했다.

석고와 안료로 덮인 표면에 총알을 쏘면 그 속에 결합되어 있는 물감 주머니가 터져 색색의 물감이 피부를 뚫고 나오는 피처럼 사방으로 튀고 흘러내려 화려하면서도 폭력적인 형상으로 변형됐다. 이때, 생팔은 평면의 캔버스 대신 일상의 사물이 결합된 이차원의 부조나 삼차원의 입체적인 덩어리를 '슈팅 페인팅'의 지지대로 제작해 사용했다.

이는 현실의 사물과 예술의 경계뿐만 아니라 회화와 조각이라는 개별 매체의 경계를 넘나들며 '순수 매체'에 대한 오래된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당대 예술가들의 전위적 공감대를 환기시킨다.

생팔은 세계 대공황 시기인 1930년 프랑스에서 태어났으며 보수적인 수도원 학교에 다녔지만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부모와의 마찰과 좌절을 겪고 이른 결혼을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충격적인 사건과 결혼 후에 깊어진 신경쇠약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입원 치료를 해야 했던 생팔은, 미술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기로 마음 먹고 1950년대 중반부터 창작의 길에 들어섰다.

이혼 후 폐품과 고철을 이용해 실험적인 키네틱 아트를 선보였던 누보레알리즘의 대표 작가 장 팅겔리(1925~1991)와 결혼하면서 조각, 퍼포먼스, 레디메이드 등과 결합한 전위적인 '슈팅 회화' 시리즈를 전개시켜 나갔다. 특히 남성 작가 중심의 당대 화단에서 여성 작가로서 가부장제의 관습에 도전하고 '액션 페인팅'과 같은 모더니즘 추상회화의 신화를 해체하려는 아방가르드의 전략과 더불어 자전적인 상실과 억압의 경험을 치유하고 극복하려는 예술적 표현의 새로운 위상을 강조했다.

생팔의 대표작 '나나(Nana)' 시리즈는 1965년에 처음 제작해 발표한 후 '슈팅 회화'에서 조각 작업으로의 본격적인 전환을 알렸다. '나나'는 프랑스어로 여성을 뜻하는 속어인데, 생팔은 풍만하고 과장된 신체의 형상과 화려한 색채를 통해 여성 신체에 가해진 왜곡되고 폭력적인 오랜 규범과 정의로부터 해방된 자유의 표상을 제시했다.

춤을 추듯 크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나나'의 형상은 대개 얼굴은 작고 몸통은 크며 가슴과 엉덩이가 풍만하게 표현돼 있어서, 마치 역사 이전의 것으로 발견된 비너스상처럼 서구 가부장제의 시선에서 타자로 길들여진 여성 이미지와는 동떨어져 있다.

'나나' 시리즈 중 '혼'(1966)은 길이가 28m, 너비 9m, 높이 7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로 제작돼 사람들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건축적 구조를 강조했다. 스톡홀름 미술관 로비에서 관객들을 참여시킨 '혼'을 계기로 생팔의 작업은 건축적 스케일의 조각을 통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로 향했다.
'골'(1972)은 예루살렘 빈민가 놀이터에 설치한 10m터 높이의 미끄럼틀로, 상상의 생명체 같은 형상의 입에서 뻗어나온 빨간색 혓바닥 위로 아이들이 공간의 경계를 자유롭게 드나들게 했다.

생팔은 팅겔리와 함께 퐁피두센터 옆에 공공조각으로 '스트라빈스키 분수'(1982)를 설치했고, 1978년에 시작해 1998년에 완공한 '타로 공원'에서는 그녀의 공공조각이 갖는 의의를 볼 수 있다.
생팔은 당시 자동차 공장에서 사용하는 비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해 조각의 기념비성에서 벗어난 공공 참여의 장(場)으로서 새로운 조각의 의의를 강조했다.

안소연 미술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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