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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의 세상만사] 선거제도 파행은 국민주권 훼손이다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2.07 19:09

수정 2024.02.08 08:35

선거는 주권실현의 도구
준연동형과 준위성정당
지금보다 더 나빠진 퇴행
주필
주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을 들먹일 것도 없이 자명한 사실이다. 평소 우리 국민은 자신이 주권자임을 실감할 수 있을까. 그럴 기회가 별로 없는 게 사실이다. 선거 때면 90도 이상 허리를 굽히고 국민의 '머슴' 되기를 간청하는 정치인들이지만 일단 당선만 되면 180도 달라진다. 국민 위에 군림하고 국민을 아래로 본다.
'선거'는 국민이 주권자이고, 최고 권력자임을 실감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인 셈이다. "오늘날 입헌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의제도에 의한 통치가 불가피한 것으로 선거야말로 국민의 의사를 체계적으로 결집하고 수렴하고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국민의 의사를 형성하는 가장 합리적인 절차"라고 한 헌재 결정도 그런 뜻이다.

여야 모든 정파의 협상과 타협에 의해 선거제가 결정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현실은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 한 사람의 '고독한 결단'에 의해 대한민국의 선거제가 좌지우지된다. 비례대표 결정방식에 대해 좌고우면하던 민주당과 이 대표가 선거를 60여일 앞둔 지난 5일에야 결론을 내린 것이다. '전 당원 투표' 대신 최종 결정권을 위임받은 이 대표의 결심 덕분(!)이다. 어떻게 평가해도 입헌민주주의 국가의 의사결정 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국민의 의사를 형성하는 가장 합리적인 제도를 만들려는 고민 때문도 아니다. 국민은 안중에 없고 개인의 안위와 정파적 고려만 있을 뿐이다. 이쯤 되면 국민이 아닌 이 대표야말로 가히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자가 아닐까 싶다.

이 대표는 긴급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성정당 반칙에 대응하면서 '준연동제의 취지를 살리는' '통합형비례정당'을 추진하겠습니다." '준위성정당'이란 표현도 있었다. 준연동형 유지, 병립형 재도입, 권역별 병립형 등의 선택지를 놓고 장고 끝에 착점한 것이다. 대선 공약을 포함, 여러 차례 '위성정당 없는 준연동형 선거제'를 공언한 이 대표 자신의 발언을 뒤집는 것이다. 일일이 세보고 싶지 않지만 유인태 전 국회사무총장에 따르면 7차례나 약속한 것이라고 한다. 이 대표는 위성정당 창당을 사과하면서도 그 책임은 국민의힘에 돌리는 발언을 했다. 통합형비례정당, 준위성정당 등의 암호 같은 용어를 사용한 이유도 스스로 면구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소수정당 배려와 책임정치 실현을 위한 '깊은 고뇌의 산물'이었음을 강조하고 끝냈다면 점수를 더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번 선거도 21대 총선과 마찬가지로 온갖 꼼수가 난무하는 추태 경연장이 될 게 뻔하다. 국민의힘은 벌써 위성정당에 누구를 보낼지 의원 빌려주기를 고민하고 있다. 무슨 용어로 분식해도 민주당의 위성정당은 군소 진보좌파 세력의 비례대표 숙주로 작용할 것이다. 함께 할 정당 및 정파조차 불분명한 상태에서 자격 미달자들의 국회 진출통로로 이용된 모습은 익히 봐온 터이다. 국민의힘이나 민주당 후보들은 여러 단계의 검증과 경선 등을 거친다. '반윤'만을 기치로 급조한 위성정당 후보들에 대해 검증은 기대하기 어렵다. 비례 재선의원, 심지어 옥중 당선자가 나올 가능성도 있다. 조국, 송영길 신당도 거부할 명분이 없지 않은가. 역대 최악으로 평가받는 21대 국회보다 더 나쁜 퇴행이라고 보는 이유이다. "준위성정당은 위성정당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악성 책략"(이낙연)이라거나 "의석 몇 석을 더 얻자고 헌법질서의 근간을 이루는 선거제도를 이렇게 누더기로 만들어도 되는가"(금태섭 )라는 비판들이 그것이다.

선거의 기능에는 심판의 성격도 있다. 야당이 윤석열 정권 심판을 내세우는 것도 심판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앞서, 신성한 국민의 주권행사 도구를 우롱한 행태를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런 선거는 있으나마나, 하나마나한 선거다. 유 전 총장의 표현처럼 '천벌'까지는 아니어도 말이다.
그런 심판마저 없다면 국민이 주권자라는 말은 너무 무력하게 느껴질 뿐이다.

dinoh7869@fnnews.comdinoh7869@fnnews.com 노동일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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