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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 구순이 되어도 그릴 거예요… 아니 더 잘 그릴 겁니다" [Weekend 문화]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2.16 04:00

수정 2024.02.16 04:00

50대 등단한 늦깎이 화가 김봉희
목회자 아내에서 전업 화가로
선한 사람들과 역사적 인물 끌려
선교사·독립운동가 등 주로 그려
고종·알렌 그린 ‘제중원을 꿈꾸다’
파리 르 살롱展 3번째 출품작
따뜻한 시선 살린 일상풍경 호평
김봉희 작가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작품'제중원을 꿈꾸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 그림은 복사본으로, 원본은 지난 14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막한 '르 살롱'전에 전시돼 있다. 사진=서동일기자
김봉희 작가가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에서 작품'제중원을 꿈꾸다'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금 그림은 복사본으로, 원본은 지난 14일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개막한 '르 살롱'전에 전시돼 있다. 사진=서동일기자
붉은 곤룡포를 걸친 고종이 정면을 응시한 채 살며시 웃고 있다. 서른 두 살 황제의 익석관은 이마 위로 살짝 올라가 있다.
작은 키를 의식했던 고종은 관을 매번 이런 식으로 썼다. 테이블엔 고종이 막 내려놓았을 커피잔이 놓여있다. 맞은편 미국인 신사는 급한 용무로 고종을 찾아온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다. 1885년 2월 29일 오후. 알렌은 이날 고종으로부터 국내 첫 서양식 병원 제중원 설립을 윤허받았다. 작가 김봉희(76·사진)의 작품 '제중원을 꿈꾸다'(2023년작)에 이들 모습이 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본관에 걸려있던 이 그림은 지금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에서 열리고 있는 '르 살롱'전(14일~22일)에 전시돼 있다. 르 살롱은 루이 14세 시절이던 1667년 첫 전시회를 가진 것이 시초다. 신인 화가들의 등용문으로, 파리의 봄을 알리는 전령사 역할을 했다. 1881년 국전에서 민전이 됐고 그때부터 프랑스 미술가협회가 매년 이 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프랑스 미협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해 작품을 출품한 김봉희 작가는 "저와 코드가 맞는다"며 웃었다. 국내 작가들은 1962년 김창락 화백의 첫 참가 이후 '르 살롱'과 꾸준히 연을 이어왔다. 올해 한국 작가 작품은 총 4점이 전시됐다. 김봉희 작가의 작품은 앞서 두 차례 전시된 적이 있다. 여행의 어느 날 숙소에서 TV를 보는 아들 가족의 편안한 오후를 담은 그림이 2014년 '르 살롱'에 걸렸다. 2년 뒤엔 피아노 건반 옆에서 악보를 보고 있는 여인 두 명을 그린 작품이 전시됐다. 지인의 집에서 우연히 포착한 장면을 유화로 표현한 그림이었다. 현지에선 특유의 따뜻한 시선으로 살려낸 일상의 풍경에 호평이 쏟아졌다.

"팔순, 구순이 되어도 그릴 거예요… 아니 더 잘 그릴 겁니다" [Weekend 문화]

김봉희 작가의 이력은 흥미롭다. 목회자의 아내로 살다 지천명을 넘긴 나이에 미술 공부를 시작해 전업 작가의 길을 걸었다. 학창시절 그의 이웃과 일가친척들 중 그의 풍경화, 정물화 한 점을 안 가졌던 이가 없었다. 학교 정문엔 그가 그린 행사 포스터가 사시사철 걸렸다. 타고난 재능을 바로 살리지 못했던 건 자식의 고생길을 걱정한 집안 반대 때문이었다. 대학에서 기독교 교육학을 전공했고 결혼 후 남편의 목회 활동을 돕느라 바빴다. 그러다 1990년 후반에서야 비로소 새 길을 찾은 것이다.

늦깎이 작가는 한번 붓을 잡으면 여간해서 놓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밤에 붓을 잡지 않으려고 해요. 밤에 시작하면 밤을 꼬박 새우고 몸이 녹초가 될 때까지 그립니다. 누가 말려줘야 멈출 수 있어요." 작업 전 탐구와 사색의 시간도 길다. '제중원을 꿈꾸다'도 기나긴 고증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과 의복, 도구의 세밀한 학습 과정은 칠순이 넘은 작가에게 그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었다. 완성된 그림 앞에서도 붓을 들어 고치고 또 고친다. 마감 시한이 돼서야 끝을 본다. 그런데도 "힘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니 천상 예술가다.

부군인 연동교회 이성희 원로 목사는 이런 아내의 후원을 자처했다. 이 목사는 130년 역사의 연동교회에서 29년 사역 후 지금은 다양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아내의 그림 속의 곤룡포 입은 고종은 사실 이 목사다. 옷을 걸치고 포즈를 잡아 아내의 작업 내내 모델이 돼줬다. 백색 정장의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2016년작)를 그릴 때도 이 목사가 모델 역할을 했다. 연세대 신학관에 걸린 이 작품은 신학대 졸업식 날 포토존 역할을 톡톡히 한다. 이 목사는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했다"고 했다.

김봉희 작가의 그림에는 선교사, 독립운동가를 그린 인물화가 많다. 세브란스병원이 소장한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 초상화도 그가 그렸다. 에비슨은 연희전문학교 통합 교장을 지냈다. 서울 도산대로 안창호 기념관 메인홀에 있는 안창호 초상화도 그의 작품이다. 그가 그린 안창호는 독립투사보다 교육자 이미지가 강하다. 그는 "삶이 좋았던 사람을 그리면 마음이 따뜻해진다"고 말했다.

작가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이 팔순, 구순이 되어서도 그릴 겁니다. 아니 더 잘 그릴 겁니다.
선 하나에도 연륜이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까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거에요." 작은 체구의 작가가 그렇게 선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jins@fnnews.com 최진숙 논설위원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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