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사라지는 야쿠자들 [김경민의 도쿄 혼네]

김경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6 10:04

수정 2024.03.16 10:04

<토요일의 도쿄 혼네> ⑦야쿠자
야쿠자? 고쿠도? 보료쿠단?
전국시대 사무라이에서 갱단으로
시대마다 '탈바꿈', 우익단으로 변신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야쿠자의 몰락
법도 비웃는 '한구레'라는 아이들
지난 2021년 일본의 지정폭력단 '구도카이'의 두목인 노무라 사토루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NHK 캡처
지난 2021년 일본의 지정폭력단 '구도카이'의 두목인 노무라 사토루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NHK 캡처

【도쿄=김경민 특파원】 "야쿠자의 지하 세계를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사는 것은 다른 행성에서 사는 것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전직 야쿠자 A씨의 아사히신문 인터뷰 중)
2022년 일본 경찰이 수사에 칙수한 야쿠자 범죄 조직의 구성원 및 준회원 수는 전년 대비 1832명 감소한 9903명으로 집계됐는데요. 이는 1991년 조직범죄방지법(폭력단대책법)을 제정한 이후 처음으로 1만명 아래로 떨어진 숫자라고 합니다. 또 2022년 말 기준 야쿠자 단체와 연계된 총 인원은 약 2만2400명으로 1년 전보다 역시 약 1700명 감소해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지하 세계의 생활을 그만두는 야쿠자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데요. 세계 3대 갱단으로 악명을 떨쳤던 야쿠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요.

야쿠자? 고쿠도? 보료쿠단?

'야쿠자'(やくざ)는 일본에서 조직을 형성해 폭력을 휘두르며 직업적으로 범죄 활동에 종사해 수입을 얻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해외에서는 '재팬니즈 마피아'(Japanese Mafia)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실 야쿠자는 속어로서 특정 단체, 조직의 명칭이 아니라고 합니다. 야쿠자들은 스스로를 임협(닌쿄) 또는 극도(고쿠도)라 부르고 있습니다. 1980년대는 협객이라는 자칭도 많이 사용했고, 지금도 야쿠자를 높여 부르려면 이 단어를 쓴다고 합니다. 협객은 조선의 주먹 김두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장군의 아들' '야인시대'에서도 자주 등장한 표현이네요. 경찰 등 정부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는 폭력단(보료쿠단)입니다.

노보리베츠 다테 지다이무라 오오에도 극장에서 사무라이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료:fnDB
노보리베츠 다테 지다이무라 오오에도 극장에서 사무라이쇼 배우들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자료:fnDB

전국시대 사무라이에서 갱단으로

일본 야쿠자의 역사, 이른바 국가가 승인하지 않은 사설 폭력 집단의 역사는 센고쿠 시대가 끝난 이후 에도 막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7세기 에도 막부가 들어서고 대부분의 전란이 종료,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150여년의 세월 동안 무력 계급에 위치해 있던 수많은 사무라이들은 일자리를 잃었다고 해요.

이들 중 변화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일부가 전쟁에서 배운 각종 살인 기술들을 바탕으로 폭력 조직을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무뢰배로 전락한 낭인들은 묻지마 식의 폭력과 공포를 바탕으로 여러 지역에서 분탕질을 쳤다는 기록이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현대의 야쿠자들은 서민들을 보호한 용감한 하층민 조직을 표방하지만, 이는 후대에 야쿠자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미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까지 전파된 야쿠자 문화로 오야붕(親分)과 꼬붕(子分)의 개념이 있는데요. 한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폭력 조직들은 두목과 부하 간의 관계를 부모 자식의 관계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며 조직원에게 절대적인 충성심을 강요했습니다.

야쿠자 하면 떠오르기 마련인 오야붕의 죄를 대신 떠맡아 감옥에 가는 꼬붕의 역할이나 잔을 나누는 의례 등도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널리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버지라 불러라' '형이라 해' '우리가 남이냐' 같은 말도 야쿠자 문화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하네요.

시대마다 '탈바꿈', 우익단으로 변신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야쿠자들은 혼란한 일본 사회의 '칼'로 득세하게 됩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공산당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일본 보수파 정부는 이를 막기 위해 대놓고 이들을 숙청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2만명 가량의 공무원 및 교원을 해직하고, 언론사에 대한 대규모 압수수색, 좌익교수들에 대한 해직권고를 단행했습니다.

이러한 충돌 속에서 이미 야쿠자식 조직으로 재편되거나 극우화된 야쿠자 조직들은 수많은 노조와 좌익 지도자들에 대한 공격의 일선에 자리잡았습니다. 이 당시 우익 갱단의 수는 750여개가 넘을 정도로 급속도로 증가했고 이들 중 일부는 아예 정당을 창설하고, 노동운동조직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60~1980년대는 야쿠자 조직들이 일본의 경제성장과 함께 급속하게 성장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항쟁과 대립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좌파계열 노조와 학생운동권이 일본 사회를 뒤흔들 정도의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자 일본의 보수우익 세력들은 이들을 분쇄하기 위해 야쿠자들을 적극적으로 '정치 깡패'로 활용했습니다.

한 야쿠자 조직의 단체 사진. X 캡처
한 야쿠자 조직의 단체 사진. X 캡처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야쿠자의 몰락

하지만 이념의 시대가 지나가고, 야쿠자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1991년 폭력단대책법이 시행되면서 야쿠자들의 생활은 훨씬 어려워집니다. 폭력단대책법은 일본 내 대규모 야쿠자 조직들을 지정폭력단이라는 형태로 규정해 집중 감시하고, 기존 조직들이 파문 등의 절차를 통해 꼬리자르기로 범죄 책임을 회피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골자였습니다.

사회에선 '반 야쿠자' 정서가 점차 대중 사이에 퍼져 나갔습니다. 날개가 꺾인 야쿠자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더 음지로 몸을 낮추게 됩니다. 이 때부터는 호텔과 골프 리조트, 목욕탕에서도 야쿠자의 출입을 전면 거부하기 시작했습니다.

2011년에는 전국 지자체들이 폭력단에 대한 배제 조례를 도입했습니다. 한번 야쿠자로 찍히면 원천적으로 은행 계좌를 개설할 수 없고, 자신의 이름으로 임대 계약서나 대출 계약서에 서명할 수도 없게 되고요. 본인의 명의로 휴대전화 개설조차 불가능하게 됩니다. 야쿠자를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시킨 것인데요. 사실상 일본 내에서 야쿠자로 활동했다가는 이제는 일상 생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죠.

2022년은 반 야쿠자법 제정 30주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일본의 폭력단원 수는 17년 연속 감소세를 나타내는 대성공을 이루게 됩니다. 이 법이 발효되기 전에는 전국에 9만명 이상의 야쿠자들이 있었지만 약 2만명까지 급감하게 됐습니다.

다만 일각에선 이 법으로 인해 야쿠자들의 자식들마저 부모가 야쿠자인 게 들통나 차별받는 연좌제 문제가 생겼고, 조직원이 일반적인 기업에 취직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사회적인 차별과 냉대가 악순환이 돼서 야쿠자 조직을 못 빠져 나온다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간사이 한구레 조직 아웃세븐. X 캡처
간사이 한구레 조직 아웃세븐. X 캡처
법도 비웃는 '한구레'라는 아이들

이 틈을 타고 일본에서는 새로운 범죄 조직이 등장하기 시작했는데요. 바로 '한구레'로 불리는 범죄 집단입니다.

한구레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반 건달' 정도의 뜻이 됩니다. 야쿠자는 폭력단대책법과 폭력단 배제조례의 적용을 받아 관리 대상으로 제재를 받지만, 한구레는 법적으로 야쿠자로 등재돼 있지 않기 때문에 관련 법의 적용을 받지 않습니다.

이들은 야쿠자처럼 간판을 내걸고 결속된 집단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네트워크 방식의 점조직으로 활동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관련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아 야쿠자보다도 훨씬 활동이 자유로워서 급속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이 상당히 젊은 MZ 집단인 것도 특징입니다. 2020년대 기준으로 간부급들은 40대에 불과하고 야쿠자 특유의 절대복종을 강제하는 상하관계나 합숙, 강압적인 규율이 상대적으로 적다고 합니다. 한구레에는 촉법소년들도 상당수라 이를 이용한 범죄가 급증하고 있어 일본에서는 큰 사회 문제로 다뤄지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 문화가 있습니다.
혼네는 진짜 속마음이고, 다테마에는 밖으로 보여주는 겉마음입니다. 개인보다는 조직·사회적 관계를 중시하는 일본인들은 좀처럼 혼네를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보는 일본은 다테마에의 파편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km@fnnews.com 김경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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