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30년의 신화가 위태롭다"

최갑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04 18:51

수정 2024.03.04 18:51

최갑천 산업부장
최갑천 산업부장
올해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에 진출한 지 50년이 된다. 1974년 12월 삼성은 운명적인 결정을 내린다.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전격 인수한 것이다. 정확히는 이건희 선대회장의 결단이었다. 한국반도체는 웨이퍼(반도체 원판) 가공을 위해 한미 합작으로 탄생했지만 시작부터 경영난이 심했다.

당시 서른두 살의 이 선대회장은 삼성의 미래를 첨단 하이테크산업으로 점찍었다.
설탕과 비료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이병철 창업회장이 TV와 백색가전으로 전기를 마련했다면 이 선대회장은 더 미래를 본 것이다. 어쨌든 이 선대회장이 사재를 털고 아버지를 설득한 끝에 삼성 반도체의 토대를 열었다. 삼성 반도체는 초기 자본잠식에 빠질 만큼 위태로웠다. 질곡의 시간은 10년이나 걸렸다. 역경 끝에 1983년 12월 1일 기념비적인 64K D램 반도체를 개발했다. 국산 반도체의 태동이었다. 일본 반도체 공장을 견학한 삼성의 '문익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본인의 눈을 피해 공장 라인을 눈과 머리에 새기고 돌아와 기흥공장에 하나씩 재연했다. 단지 회사원이 아닌 구국(求國)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1980년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일본의 시대였다. NEC, 도시바, 후지쓰, 마쓰시타(현 파나소닉), 히타치의 세계 메모리시장 점유율이 80%였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인텔을 앞세워 30년 넘게 반도체 시장을 장악했던 미국은 처참히 무너졌다. 오일쇼크 등 자본주의 황금시대의 종말이었다. 가성비와 집요한 기술개선으로 일본은 1990년대까지 반도체 시장을 호령했다. 1990년대 후반 미국의 대대적인 반덤핑 공세가 없었다면 일본 반도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일본을 향한 미국의 견제는 한국에 큰 기회였다. 그새 무섭게 기술력과 제조력을 끌어올린 삼성전자가 메모리 왕좌를 차지했다. 그리고, 30년간 패권을 지키고 있다. 어쩌면 한국 경제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일지 모른다.

지난달 26일 미국 마이크론이 5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3E 세계 최초 양산을 선언했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상당한 격차의 D램 세계 3위 기업이다. HBM은 지난해부터 폭발적 성장 중인 생성형 인공지능(AI) 산업의 핵심 기술이다. AI 분야 최대 수혜기업인 엔비디아가 그래픽처리장치(GPU)에 필수 탑재하는 반도체다. HBM시장을 선점한 SK하이닉스 주가가 요동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술력에서 앞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올 상반기에나 5세대 제품을 양산할 계획이다. 기술역전이 어려운 D램 분야이기에 마이크론의 발표가 느닷없다는 반응도 있다. 후발주자의 마케팅 용도라는 시선도 있다. 관건은 수율(양산품 비율)이다. 마이크론이 얼마나 고객사를 만족시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보도 이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당황보다는 느긋한 낌새다. 치열한 산업 정보전쟁에서 믿을 만한 '소스'를 확보한 것일까. '칩워'의 저자 크리스 밀러 터프츠대 교수도 "마이크론의 약진에도 삼성과 SK의 메모리 주도권은 큰 영향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거미줄처럼 엮인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가 과거처럼 일순간에 뒤바뀔 수 없다는 논리다. 세계적 석학의 혜안이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안하다. 지난 30년간 한국은 메모리 강국 위상에 균열은 없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세계시장 점유율은 80%를 넘어 철옹성을 쌓았다. 과거 인텔이나 일본 반도체처럼 말이다. 하지만 게임용 GPU로 먹고살던 엔비디아가 단숨에 AI 최대 기업이 된 세상이다. AI가 반도체의 판도 바꾸고 있다. 샘 올트먼의 오픈AI가 7조달러(9300조원) 규모 자금을 조성해 글로벌 AI반도체 시장의 지각변동을 꿈꾸고 있다.
인텔도 마이크로소프트(MS)와 AI반도체 혈맹관계를 구축할 조짐이다. 미국 정부도 반도체 보조금을 자국 기업에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모양새다.
K반도체 운명의 시계가 째깍째깍 돌아가고 있다.

cgapc@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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