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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의 기술빅뱅] 자유활달 소니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1 18:34

수정 2024.03.11 18:34

자신감 되찾는 日기업들
모바일실패 딛고 AI도전
어제의 강자 韓 분발해야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크리스 밀러 미국 터프츠대 교수가 쓴 '칩워(Chip War)'에 일본 기업 소니 창업주 모리타 아키오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 모리타가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46년 소니를 창업하고 몇 해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 그의 눈에 미국은 모든 것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30여년이 흐르면서 생각은 완전히 바뀐다. 그사이 기술 하나로 세계를 거머쥔 모리타에게 미국은 이제 시끄럽고 범죄가 들끓는 도시로 보였을 뿐이다.

뉴욕 맨해튼 5번가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건너편에 그의 아파트가 있었다.
워싱턴 정가 인물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방문자 명단엔 헨리 키신저 등 유명 인사가 즐비했다. 이들과 교제하며 모리타는 본심을 숨기지 않았다. "미국이 변호사를 길러내는 동안 일본은 엔지니어를 배출했다." 이 생각을 집대성한 책까지 펴내는데 우파 정치인과 함께 작업한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 그 책이다.

미국 정가는 분노로 들끓었다. CIA는 공식 출판 전에 내용을 입수해 내부에서 공유했다. 책은 '일본의 기술을 보라. 일본산 반도체 없이 미국은 없다. 미국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 요지였다. 미국이 충격에 빠진 것은 모리타의 느닷없는 도발 탓만은 아니었다. 미국은 책의 주장이 섬뜩할 정도로 사실이라고 판단했다. 밀러 교수는 그때를 두고 대일전략을 새로 짤 수밖에 없었던 순간이었다고 기록한다. 모리타는 뒤늦게 저자 목록에서 자신의 이름을 뺐지만 달라질 건 없었다.

일본의 전자·반도체 기업은 서서히 침몰을 시작했다. 끝도 없이 미국에 끌려다닌 정부, 굴욕적인 미일협정의 후유증은 오래갔다. 붕괴의 씨앗은 기업 내부에도 있었다. 아날로그 시대 기술의 정점에 있었던 기업들이 거대한 디지털 물결을 미처 보지 못한 것은 기이한 측면도 있다. 소니 역시 다르지 않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리튬이온배터리를 상용화했고, 워크맨과 5인치 초소형 TV로 '가전의 신'이 됐지만 모바일 대전환에 한발 늦었다. 범용화 파도, 가격경쟁력을 과소평가한 것도 명백한 실책이었다.

소니의 매출은 1997년 정점을 찍는다. 침체가 쇼크로 확인된 것도 2003년 4월 24일이다. 전년도 결산 결과 소니의 영업이익은 전망치보다 1000억엔이나 낮았다. 닛케이 주가는 소니 쇼크로 버블 후 최저로 폭락했다. 추락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망할 것만 같던 회사를 되살려낸 이가 히라이 가즈오 전 회장이다. 소니뮤직 변방 출신의 히라이가 2012년부터 시작한 소니 개혁은 유명하다. 그는 현재와 미래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은 사업은 과감히 팔았다. PC, TV사업부가 이때 정리되고 재편됐다. 게임, 음악, 영화에 집중해 콘텐츠 기업으로 체질을 바꾸면서 차세대 반도체 역량은 다시 살리는 전략을 택했다. 비메모리반도체 이미지센서 시장에서 소니가 지금 누리는 독보적인 위치도 이런 개혁의 결과물이다. 소니는 히라이 재임기 극적인 반등에 성공했고, 지난 2022년 사상 최대 실적을 이뤄냈다.

히라이 회장은 자신의 소니 재건사를 기록한 '소니 턴어라운드'에서 진정으로 되찾고 싶었던 것은 과거 소니의 자신감과 패기, 열정이라고 했다. 그의 진심은 창업주 모리타가 쓴 회사 설립 취지서에 쓴 글과도 닿아있다. 거기엔 '성실한 기술자의 기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는 자유활달하고 유쾌한 이상 공장'이 목표라고 쓰여있다. 모리타의 기발함은 회사 채용공고에서도 드러난다. 모리타가 신문 광고로 낸 채용공고 타이틀이 '모난 돌을 구함!(1969년)'이었다. 스티브 잡스가 모리타의 열렬한 추종자였다는 사실은 이상하지 않다.

소니의 재기를 되짚어 보는 것은 다시 신발 끈을 묶고 있는 일본 기업들의 맹렬한 공습 때문이다. 지금 사상 최고치를 달리는 일본 증시도 소니같이 부활에 성공한 기업들의 힘이다.
모바일 실패를 딛고 인공지능(AI) 새 판을 준비하는 결의가 심상치 않다. 일본 정부는 전국 곳곳을 첨단 반도체 공급기지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우리는 이대로 괜찮은가. 과거의 성취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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