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학 건강

[한동하의 본초여담] 의녀의 침구 실력을 높이고자 OO을 만들었다

정명진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6 06:00

수정 2024.03.16 15:48

[파이낸셜뉴스] 본초여담(本草餘談)은 한동하 한의사가 한의서에 기록된 다양한 치험례나 흥미롭고 유익한 기록들을 근거로 이야기 형식으로 재미있게 풀어쓴 글입니다. <편집자 주>

1741년, 영조의 명으로 최천약(崔天若)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침금경혈동인상(靑銅鍼金經穴銅人像)’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1741년, 영조의 명으로 최천약(崔天若) 등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침금경혈동인상(靑銅鍼金經穴銅人像)’이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때는 1730년 조선 영조 때, 궁에는 송월(松月)이라는 의녀가 있었다. 송월은 침의(鍼醫) 중 한 명으로 침을 잘 놓았다. 그래서 궁 밖의 여염집의 부인들도 병이 나면 대부분 송월을 찾았다.


송월 이전에 승례(承禮)라는 의녀가 있었다. 승례는 침구(鍼灸) 실력이 송월보다 뛰어나서 남자 의관들도 승례에게 상의할 정도였다. 그러나 성격이 괴팍했다. 승례는 누군가와 시비가 붙으면 항상 침통에서 대침을 꺼내서 급소를 찔러버리겠다고 윽박을 지르곤해서 모두들 혀를 내둘렀다.

그런 승례는 이미 죽었고, 그 뒤를 이은 송월은 실력과 성품을 모두 겸비했기에 모두들 송월을 칭찬했다. 영조 또한 침을 맞을 일이 있으면 송월을 찾았다. 또한 대왕대비에게 침을 놓을 일이 있으면 특별하게 송월에게 침을 잡도록 윤허했다.

어느 날 영조는 두통이 있어서 송월을 찾았다.

“내 두통으로 침을 좀 맞아야겠으니, 송월을 들라 하라.” 그러자 신하는 “송월은 지금 사흘째 궁에 들어오지 않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송월은 며칠 전부터 몸살이 나서 궁에 들어오지를 못했다. 영조는 송월 이외에는 침을 잘 놓는 의녀가 없어서 걱정이었다.

영조는 “의녀 한 명이 몸살이 났다고 침을 맞지 못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것이냐? 의녀 중 침의를 더 뽑도록 하라.”라고 했다.

그러자 신하 윤순이 아뢰기를, “지금 궁 밖에서 실력있는 의녀를 구하고자 노력하고 있사오나 그들 중에 조금 나은 자의 경우를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침놓는 실력을 바로 확인할 방도가 없어 애를 먹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그렇다면 침구동인(鍼灸銅人)이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송월은 밖에서 대감집 부녀자들에게 침을 놓기 전에 먼저 하인들에게 시험 삼아 침을 먼저 놓는다는 소문이 있다고 들었다. 만약 동인(銅人)이 있으면 생사람에게 시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종종 입시하는 의녀에게도 동인을 통해서 단련하도록 해도 좋을 것이다.”라고 했다.

동인(銅人)은 몸에 경락과 혈자리를 표시해서 혈자리를 익히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든 청동 인형이다. 신하들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영조가 동인에 관심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동인을 만드는 일이 많은 청동이 소요되었기 때문에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영조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혹시 내의원에 동인이 있는가?”하고 묻자, 윤순이 아뢰기를 “목인(木人)은 있지만 동인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영조는 “그렇다면 중국에는 동인이 어떠한가? 많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 중 한 명이 “중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동인은 송나라 의관원에서 왕유일(王惟一)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성동인(天聖銅人)이 있사옵니다. 당시 2개의 동인을 제작했는데, 한 개는 의관원에서 의원들이 침구술을 학습하는데 사용했고, 한 개는 침구고시를 거행하는데 이용했다고 합니다. 이후 명대와 청대에 이르러서 많은 동인들이 제작된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왕유일은 또한 침구서로 <동인수혈침구도경(銅人腧穴鍼灸圖經)>을 편찬했는데, 지금 조선에는 이 서책의 필사본만 있사옵니다.”라고 말했다.

영조는 “조선의 궁에 동인 하나 없어서야 말이 되겠는가? 옛날 선왕 때에 보니 침의들이 정확한 혈자리를 잡지 못하고 쩔쩔매고 침구 수련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고 들었다. 목인은 시간이 지나면 형태가 틀어지고 모양이 바뀔 수 있으니 서둘러 동인을 제작하도록 하라.”하고 명을 내렸다.

이렇게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동인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신하 중 누구하나 책임지고 만들고자 하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영조 이전 선왕 때에도 동인의 필요성이 많이 언급되었지만 그때 뿐이었다.

어느 날, 영조는 불쑥 “지금 궁에 동인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신하 김재로가 당황해하면서 “목인만을 더 만들어 놓았습니다. 목인을 더 만든 것은 장차 이러한 모양으로 동인을 주조하여 만들려고 한 것인데 동인은 미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이것은 일종의 핑계였다.

이에 영조는 낙담하는 듯하더니 “동인을 만드는데 많은 재물과 노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도다. 시간이 들더라도 제대로 된 동인을 만들도록 하라.”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입가에 흥미로운 미소를 띠거니 “만약 만든다면 혈자리에 구멍을 뚫어 놓고 밀랍을 밖에 붙이고 안에 물을 모아 놓은 뒤 혈에 침을 놓아 물이 새게 만들면 어떻겠는가?”라고 했다.

발명가다운 발상이었다. 영조의 설명을 들은 신하들은 깜짝 놀랐다. 영조가 그토록 동인에 관심이 높은 줄을 몰랐고, 그 기발한 상상에 감탄했다.

이에 김재로는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동인을 신속하게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린 대로 최천약(崔天若)이 손재주가 좋으니 그에게 속히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해가 짧아진 뒤에는 공역이 배나 들어가더라도 더디게 될 텐데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청동을 전보다 쉽게 구할 수 있으니 보다 수월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최천약은 화포개발에도 참여했고 보루각을 재건했던 조선 최고의 자명종 기술자였다.

영조는 “그리하라. 동인이 만들어진다면 침의 의녀들을 교육시키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송월은 매우 착실하고 침치료에 능숙하다. 대왕대비마마가 살아계실 동안에도 송월에게 침 맞는 것을 흡족해하셨다. 그러나 송월의 나이도 이미 60세가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송월을 대를 이을만한 의녀를 하루빨리 발굴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1741년, 조선에서도 드디어 동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의 기술자이자 장인인 최천약이 편종을 주조하는 주종소(鑄鍾所)에서 청동을 녹여서 동인을 만들기 시작했다. 최천약은 의학적인 지식이 없기에 내의원의 수의(首醫) 오지철과 침의 2명이 감독을 했다.

동인은 남자 중인(中人) 정도의 체격 크기로 제작했다. 속은 비어 있었고 전신에 걸쳐서 12쌍의 경락과 임맥, 동맥을 그렸고 각 경락 위에 총 354개의 경혈을 표시했다. 그리고 정수리 부위에 직경 1cm의 구멍과 그 양측에는 4mm의 보조 구멍을 만들었다. 그리고 각 혈자리 마다 음각으로 혈명을 새겼으며 혈자리에는 작은 구멍을 뚫었다.

동인을 완성한 후 녹아 있는 밀랍 통에 넣어서 모든 혈자리가 막히도록 했다. 그리고 맨 위 정수리 부위에 물을 채워 넣었다. 그래서 침의에게 혈자리를 찾아 침을 놓도록 했는데, 정확한 자리에 침을 찌르면 그곳을 통해서 물이 빠져나왔다. 영조가 말한 내용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바로 침금동인(鍼金銅人)이다.

동인이 완성되자 평상시에 침의들이 혈자리를 익히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동인을 활용하면서 의녀들의 침구실력은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이제야 송월의 뒤를 이을 의녀들을 양성할 수 있었다.

동인은 이후 영조 앞에서 침구술의 우열을 시험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밀랍으로 막힌 혈자리를 찾지 못해 침으로 청동을 뚫을 수 없으니 이곳저곳을 찔러대면서 당황했고, 누군가는 침을 정확하게 찔러 넣었고, 침을 빼자 가는 물줄기가 타원형을 그리며 시원스럽게 밀려 나왔다. 영조는 신하들을 치하하며 흡족해했다.

이 동인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청동침금경혈동인상(靑銅鍼金經穴銅人像)’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져 있다.

* 제목의 ○○은 ‘동인(銅人)’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승정원일기> ○ 英祖六年, 五月十九日午時. 上曰, 俄者受鍼時刻已迫, 故不得下敎矣。醫女松月, 執鍼頗熟, 日後則勿爲更稟, 受鍼間, 使松月執鍼, 可也. 致中曰, 閭間有婦人之病, 則松月多往來見之云矣。錫五曰, 臣曾在史官, 有所聞之, 承禮在時, 雖醫官輩, 多有相論講定之事云矣. 承禮死後, 今無可信之醫女矣. 上曰, 承禮, 善爲執鍼而不從容, 多有泄泄之事矣. 闕中往來之時, 必抽鍼而恐喝人云矣. 致中曰, 果有如此事矣. 淳曰, 醫女勸課之道, 常常自外申飭, 而渠輩中稍優者不易矣. 上曰, 種種入侍之醫女, 使之鍊達, 則似漸勝矣. 藥院不有銅人及木人乎? 淳曰, 木人則有之, 而銅人無之矣.銅人雖欲造成, 精造如崔天若者, 未易得也. 上曰, 問判決事之言, 則松月在外, 先試鍼於一人云, 若有銅人, 則不必試於生人, 試之於銅人好矣. (영조 6년 경술, 1730년 음력 5월 19일 오시. 상이 이르기를 “아까 침을 놓을 시각이 임박하였기 때문에 하교하지 못했다. 의녀 송월이 침을 잡는 것이 제법 익숙하니 앞으로는 다시 나에게 보고하지 말고 침을 놓을 동안 송월로 하여금 침을 잡게 하라.”하니, 홍치중이 아뢰기를, “여염집의 부인이 병이 나면 송월이 대부분 왕래하며 진찰한다고 합니다.”하였다. 정석오가 아뢰기를, “신이 전에 사관이었을 적에 들은 것이 있는데, 승례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아무리 의관이라 해도 서로 논의하여 정하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승례가 죽고 난 지금은 믿을 만한 의녀가 없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례가 침은 잘 놓았지만 차분하지 못하고 황당한 일이 많았다. 궐에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침을 뽑아 사람들에게 공갈을 놓았다고 한다.”하자, 홍치중이 아뢰기를, “정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하였다. 윤순이 아뢰기를, “의녀를 독려하는 방도를 항상 밖에서 신칙하지만 그들 중에 조금 나은 자의 경우는 쉽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종종 입시하는 의녀에게 단련하도록 하면 점점 나아질 것이다. 내의원에 동인이나 목인이 없는가?” 하자, 윤순이 아뢰기를, “목인은 있지만 동인은 없습니다. 동인을 만들려고 해도 최천약처럼 정교하게 만드는 자를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결사의 말을 들으니, 송월이 밖에서 먼저 한 사람에게 시험 삼아 침을 놓는다고 하던데, 동인이 있으면 생사람에게 시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인에게 시험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 英祖 17年 5月 17日 庚辰. 金在魯曰, 以本院事, 有所仰達. 銅人自前有設置之議, 前都提調時, 先造木人, 將以此樣, 鑄成銅人而未及矣. 上曰, 以蠟附外, 而內儲水針穴而水漏, 則謂之善矣。予見木人, 此亦善造, 意謂木人與銅人無異矣. 在魯曰, 木人則是銅人之草本也。崔天若有手才, 善於此等之事, 與針醫廳首醫吳志喆, 相議造置爲好, 而前頭日短後, 則工役倍入而且遲, 且所入不甚多, 從速造置, 何如? 上曰, 依爲之. 出擧條 上曰, 豐陵在時有言矣. 卿等亦勸奬醫女乎? 松月甚着實, 年過六十, 善占穴, 最知醫理. 大王大妃殿問候時知之矣. 金在魯曰, 此如朝廷官序, 不足之類亦多, 循序入內醫矣。洪景輔曰, 久不講矣. 春等講行之則無狀, 故其時醫官罰直矣。豐原在時, 着實擧行, 而無繼行者, 故講之時眞是誦風經而脈醫女一人, 針醫女十一人, 皆不足矣. (영조 17년 5월 17일 1741년. 김재로가 아뢰기를, “본원의 일로 우러러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동인은 전부터 설치하자는 의론이 있었습니다. 전 도제조 때 우선 목인을 만든 것은 장차 이러한 모양으로 동인을 주조하여 만들려고 한 것인데 미처 완성하지 못했습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밀랍을 밖에 붙이고 안에 물을 모아 놓은 뒤 혈에 침을 놓아 물이 새면 잘 만들었다고 이를 만하다. 내가 목인을 보았는데 이것 역시 잘 만들었다. 생각건대 목인은 동인과 다름이 없다고 여겨진다.”하였다. 김재로가 아뢰기를, “목인은 동인을 만들기 위해 초벌로 만들어 놓은 본입니다. 최천약은 손재주가 있어서 이러한 일을 잘하니, 침의청의 수의인 오지철과 상의해서 만들어 두면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 해가 짧아진 뒤에는 공역이 배나 들어가더라도 더디게 될 텐데, 또 들어가는 비용이 그다지 많지 않으니 속히 만들어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리하라.”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풍릉이 살아 있을 때 한 말이 있는데, 경들 역시 의녀를 권장하는가? 송월은 매우 착실하여 나이가 60이 넘었는데도 혈자리를 잘 잡고 치료하는 이치를 제일 잘 안다. 대왕대비전에 문후할 때 그런 줄을 알았다.”하니, 김재로가 아뢰기를, “이는 조정의 관등 서열과 같아서, 능력이 부족한 자들이 또한 많은데도 순서에 따라 내의에 들어갑니다.”하고, 홍경보가 아뢰기를, “오랫동안 강을 하지 않아서 춘등에 강을 시행했더니 변변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때의 의관은 벌로 당직을 섰습니다.
풍원이 있을 때에는 착실히 거행했는데 계속해서 거행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강할 때에는 참으로 풍경을 외우는데, 맥을 짚는 의녀 1인과 침을 놓는 의녀 11인이 모두 부족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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