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강남시선

[강남시선] 말의 품격

정순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3 18:15

수정 2024.03.13 18:41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부국장
정순민 문화스포츠부장·부국장
지난 8일 출근길에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를 들었다. 뉴스쇼 청취는 꽉 막힌 올림픽대로를 지날 때 지루함을 달래주는, 나의 아침 루틴이다. 이날의 출연자는 김성태 전 국민의힘 의원과 최재성 전 청와대 정무수석이었다. 아마도 제22대 총선을 한달여 앞두고 여야를 대표하는 정치고수 두 분을 초대한 듯했다. 뉴스쇼 진행자가 두 사람에게 공통 질문을 던졌다. "얼마 남지 않은 총선 판세를 뒤집을 만한 변수를 두 개만 꼽아라."

우선 최 전 수석은 "통합 선대위와 막말"을 꼽았다.
이어 김 전 의원은 "선명한 메시지와 막말"이라는 대답을 내놨다. 정파를 달리하는 두 사람이 동시에 막말을 이번 총선의 최대 변수로 꼽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또 놀라웠다.

그러면서 김 전 의원은 지난 2004년 제17대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을 언급했다. 정 의장의 당시 워딩은 정확히 이랬다. "미래는 20대, 30대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한걸음만 더 나아가 생각해 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사실 정 의장의 이 발언은 60~70대의 투표 불참이 아니라 20~30대의 정치참여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그렇게 해명도 했다. 하지만 민심의 거센 역풍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엎드려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지만 논란은 계속됐고, 결국 정 의장은 당 의장직과 공동선대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최 전 수석은 지난 2020년 제21대 총선을 앞두고 논란이 됐던 차명진 전 의원의 세월호 막말을 사례로 들었다. 당시 차 전 의원은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세월호 유가족들.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쳐먹고, 찜 쪄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 그러자 세월호 유가족은 물론 당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일부 우파 유튜버들이 "틀린 말을 했냐" "없는 말을 했냐""세월호가 무슨 성역이냐"며 차 전 의원을 두둔했지만, 김종인 당시 미래통합당 총괄선대위원장은 "최소한 국회의원에 입후보한 사람이라면 말을 가려서 해야 할 것 아니냐"며 격노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도 막말이 쏟아져 나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인천 계양을 유세현장에서 "설마 2찍(20대 대선에서 기호 2번 윤석열 후보를 찍은 사람들을 비하하는 용어) 아니겠지"라고 했다가 곧바로 사과했고, 국민의힘 성일종 후보는 장학금 전달식에서 인재육성의 중요성을 말하다가 하필이면 성공 사례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언급해 물의를 빚었다. 또 정청래 최고위원은 "(일대일 토론을 하게 된다면) 한동훈 비대위원장에게 2분간 말할 기회를 줄 의향이 있다. 그쪽은 2찍이니까"라고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5·18 민주화운동을 학살로 규정하는 건 허구적 신화다. 5·18이 북한과 무관하면 검증에 당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도태우 변호사는 가까스로 국민의힘 대구 중·남구 후보자격을 유지했다.

모름지기 말이란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고 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말이 적으면 근심이 없고(과언무환·寡言無患), 말을 삼가면 허물이 없다(신언무우·愼言無尤)고 여겼다. 자신의 문집에 '자경(自警)'이라는 글을 남겨 말 많음을 스스로 경계했던 조선 선비 윤기(1741~1826)는 이런 태도를 아름답다고까지 했다. "말을 하려다가도 도로 거둔다면 말을 해야 할 때 말을 하고, 말을 하지 말아야 할 땐 말을 하지 않게 된다. 때에 맞춰 누그러뜨린 뒤에 말하면 허물도 없고 후회도 없을 터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한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내는 한자 품(品)은 입 구(口) 세 개가 쌓여 이뤄진 말이다. 품격이란 곧 쌓이고 쌓인 말의 탑이나 다름없다는 얘기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言)은 또 어떤가. 글자 안에 두 이(二)가 있는 건 아마도 두 번 생각하고 말하라는 뜻일 게다. 한순간의 말실수로 공든 탑이 무너지는 일이 없도록 자중하고 또 자중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에서도 이길 수 있다.

jsm64@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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