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기고

학창시절 친구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처럼 간지럽게 움튼 봄꽃 [작가와의 대화]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3.19 19:20

수정 2024.03.19 19:20

신달자 시인의 고통이여 나의 친구여 !
추억! 그 울음소리 웃음소리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일러스트=정기현 기자
그 옛날 1960년대 초에는 날마다 스타 배우였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은 배우라는 이름은 스스로 만든 허깨비였지만 쓸쓸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하는 화려한 배우였던 것이다.

미니스커트를 입고 높은 하이힐을 신고 누구도 부르지도 않는 명동을 싸돌아다니다 집에 가면 두 다리가 퉁퉁 부어 있고 통증이 왔지만 엉터리 시를 밤새 쓰고. 아 나는 국문과 학생. 잠은 거리로 몰아내고 시를 쓰곤 했다. 나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시인이 될 것. 이것이 그날 밤의 꿈이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대학 4년은 참 많이도 웃고 울고 하루하루 주인공이 되어 자작 영화를 수천편 마음으로 만들곤 했던 것이다.
학교를 갈 때 혹은 집으로 갈 때 효창공원을 홀로 걸어다닐 때도 나는 저기 어디쯤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가 아니라 여러 명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환상은 망상이었지만, 그러나 그런 망상이 텅 빈 환상의 헛된 사치성 생활에 '아름다움'을 꿈꾸게 했을 것이다.

그 시절엔 별명을 짓는 일이 많았다. 우리 반 용자는 으뜸으로 별명을 잘 지어 친구들에게 선물을 했다. 1962년은 미국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하고 그의 부인 재클린은 세계적 인기 스타가 되었다. 미국에서 얼마나 먼 한국의 서울 효창동까지 재클린의 모든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곤 했다. 특히 그 시절 미장원에선 재클린 스타일 머리가 유행했다. 나도 재클린 머리가 맘에 들었다. 미장원에 가서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재클린 머리요."

일본말로 '소두마끼'라고도 했는데 학교에 가면 비슷비슷한 여학생들이 많았다. 그 머리를 많이 하고 다녀서일까. 용자는 내 별명을 '숙명 재클린'으로 정해주고 김밥 한 줄을 먹고 내게 돈을 내라고 했다.

"내가?"

"이 별명은 좀 비싼데 너한테 싸게 해준 거야!"

그렇게 숙명 재클린으로 살았다. 그때는 여학교에 남자가 들어올 수 없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늘 남학생들이 우루루 서 있었는데 어느 날 영문과 고향친구가 내게 편지 한 장을 내밀었다.

"정문 앞에서 어떤 놈이 주더라."

편지 앞에는 큰 글씨로 '숙명 재클린에게'로 되어 있었다. 학교 밖에까지 풍문이 돌고돌았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런 편지를 몇몇 남학생에게 받았지만 꿈쩍도 안 했다. 우리 국문과 친구들도 모두 나를 재클린으로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를 봤다. 와아 거기 나오는 오드리 헵번이 너무 예뻐서, 아름다워서 나는 다음 날 학교에서 용자에게 우선 김밥을 사 먹였다. 커피도 샀다.

그리고 은밀히 비밀처럼 귀에 속삭였다.

"내 별명 오드리 헵번으로 해주면 안 되겠니?"

"……."

용자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교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한 학기 동안 내 용돈을 거의 다 용자에게 썼다. 그리고 그 애만 보면 하실하실 웃었다. 헵번의 사진을 들고 다니며 비슷하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한 학기가 지나고 방학이 지나고 가을이 왔다. 나는 헵번에 대한 욕심이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김밥을 샀고 커피를 샀고 과자를, 사탕을, 짜장면을, 짬뽕을 샀다. 어느덧 가을학기가 끝나가려는 10월쯤 용자가 귓속말을 했다

"내일 10시에 운동장 느티나무 아래로 와라."

와아 드디어 성공이구나. 나는 오드리 헵번이야, 숙명 오드리 헵번이야, 성공이야.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보고 비슷한 옷을 찾고 얼굴을 매만졌다. 기다리고 기다린 순간이 왔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10명 정도의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용자의 기술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용자가 입을 열었다.

"지난해부터 달자가 내게 부탁을 했어. 누구나 부러워하는 숙명 재클린을 마다하고 오드리 헵번으로 바꿔달라는 거야. 너희도 잘 알지. 오드리 헵번은 달자에게 너무 무리가 많아. 그런데 그동안 달자에게 얻어먹은 게 너무 많아. 나도 양심이 있지. 그래서 오늘 새 별명을 가져 왔어."

용자는 손에 쥐고 있는 긴 종이 한 장을 툴툴 털어 좌악 폈다. 종이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신달자의 별명은 오드리 될 뻔."

친구들은 까르르르 웃으며 흩어졌다. 용자가 말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 마라. 그래도 오드리가 붙어 있잖아."

나는 조금 눈물이 나려 했지만 참았다. 순간 그냥 오드리라고만 하면 어떨까 '될 뻔'은 빼고. 그렇게 말했으나 친구들은 한순간 웃고 지나가 버렸다. 그 후 '될 뻔'은 나를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1965년 졸업을 하고 취직이 될 뻔하다가 안 되고, 될 뻔하다가 되지 않았다.

"나 이 별명 안 해!"

용자에게 화를 내었지만 용자는 갈갈 웃었다.
양재천엔 봄꽃이 다 피었다는데 우리 집 뜰은 이제 빠알간 움이 간지럽게 올라오고 있다. 마치 용자의 웃음소리처럼….
신달자 시인
신달자 시인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