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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의 춤과 함께] 발끝으로 서는 남자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5.02 18:06

수정 2024.05.03 15:30

여성전유물이던 토슈즈
남성무용수가 신고 공연
통념허물고 새지평 열어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
얼마 전 서울시발레단의 창단 사전공연 '봄의 제전'을 관람했다. 48년 만에 탄생한 국내 3번째 공공 발레단으로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국립발레단, 유니버셜발레단과는 차별되는 현대적 감수성과 한국의 독창성을 반영하여 현대발레 중심으로 만들어진 단체이다. 전통적 경계를 넓히고 관객에게 문화의 범위를 확장시켜주는 동시에 무용수들에게는 다양한 무대를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공연을 보면서 매우 눈에 띄었던 것은 남성무용수가 여성무용수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토슈즈(원래는 포인트슈즈(pointe shoes)가 맞지만 한국에서는 토슈즈(toe shoes)로 알려져 있다)를 신고 여성무용수의 스텝을 아무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추는 모습이었다.

발레는 전통적으로 남녀의 역할이 명확히 구분되는 예술장르 중 하나다. 17세기 초기에는 주로 남성무용수에 의해 무대가 이루어졌는데, 루이 14세가 직접 춤을 췄을 뿐만 아니라 남성무용수가 무대의 주요 역할과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했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발끝으로 서는 기법이 탄생하면서 여성무용수의 시대가 찾아오게 되었다. 1832년 안무가 필리포 탈리오니는 그의 딸 마리아 탈리오니에게 혹독한 훈련을 통해 발끝을 완전히 세워 춤을 추는 동작을 선보이면서 '라실피드'라는 작품을 통해 포인트슈즈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발끝으로 서는 기법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마리아 탈리오니는 일약 스타가 되었다. 공기처럼 가볍게 뜨고 싶은 욕망에서 창안된 포인트슈즈는 가죽 재질로 만들어져 발가락을 모아주는 정도의 간단한 구조였고, 현재 발을 지탱할 수 있도록 토박스(toe box)가 있는 구조로 발전했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여성무용수들이 복잡하고 화려한 테크닉 동작을 수행할 수 있게 했으며, 남녀 무용수들의 기술과 수업방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서로 다른 기술적 특성을 가지고 있기에 남녀 별도의 수업이 있으며, 남녀가 함께하는 듀엣 무대를 위해 파드되 수업도 진행한다.

이처럼 발레에서 포인트슈즈는 단순히 춤추는 도구를 넘어 남녀 무용수의 역할과 이미지를 구분하는 상징이었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표현의 시도와 함께 여성무용수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포인트슈즈를 착용하는 남성무용수가 무대에 등장하면서 현대발레는 안무가와 무용수에게 무한한 창작의 가능성을 안겨주었다. 발레작품 '신데렐라'에서 남성무용수가 포인트슈즈를 신고 계모 역을 맡아 코믹한 춤을 추거나 모든 단원이 남성으로 구성된 미국의 '트로카데로 발레단'(Les Ballets Trockadero de Monte Carlo)은 남성무용수가 튜튜(여성무용수가 입는 치마 모양의 의상)와 포인트슈즈를 착용하고 여성의 역할을 맡아서 공연을 한다. 클래식발레를 풍자적이고 유머러스한 스타일로 재해석하며, 기술적으로는 정교하면서도 과장된 표현과 코믹한 요소가 가미되어 있어 관객에게 발레의 아름다움과 동시에 웃음을 선사한다.

이렇게 포인트슈즈란 풍자적인 도구로 쓰였는데 서울시발레단의 포인트슈즈를 신은 남성무용수의 춤은 코미디적 요소가 아닌 여성무용수의 상징인 포인트슈즈를 남성이 소화하여 발레의 다양한 매력을 선보이는 시도로 보였다. 발레에서 남성무용수의 포인트슈즈 착용은 작품의 새로운 해석을 넘어 젠더 역할의 전통적인 경계를 허물고 재정의하는 중요한 문화적 현상이라고 본다. 발레가 단지 기술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안무가와 무용수의 새로운 창작의 도전을 가능하게 하며 전통적인 발레의 틀을 확장하고 혁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발레는 지속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내고 보다 폭넓은 대중과의 소통을 모색하게 되는 것이다.


클래식 발레의 영원한 가치를 지키면서도 시대의 변화에 맞춰 나아가는 새로운 발레 작품과 테크닉이 어떻게 변화될지 깊이 고민하게 되는 날이었다.

경희대 무용학부 교수box5097@fnnews.com 김충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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