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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라면, 바다를 건너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7.01 18:19

수정 2024.07.01 19:07

세계인의 놀이가 된 라면
신뢰와 교류, 융합의 정석
수출 키울 정교한 정책을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라면의 탄생은 수천년 동안 이어진 허기를 달래준, 식량사의 전환으로 꼽힌다('라면을 끓이며')"고 말한 이는 소설가 김훈이다. 라면이 우리나라에 처음 나온 것이 1963년이었다.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됐던 시대다. 시장 상인들은 미군 부대에서 나온 잔반과 음식물 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여 5원에 팔았다. 간혹 씹다 뱉은 껌이나 담배 꽁초까지 섞여있기도 했으나 그마저도 못 먹어 굶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라면은 이 배고픈 시절을 배경으로 한다.


인스턴트 라면의 창시자는 대만 출신의 일본 귀화인 안도 모모후쿠다. 종전 후 암시장의 굶주린 사람들을 보고 사업 구상을 한 게 시작이었다. 건조한 면에 양념을 입힌 세계 첫 라면을 1958년 출시했다. 이 업체가 일본 최대 식품 기업으로 성장하는 닛신식품이다. 하지만 수프를 라면에서 분리해 지금의 라면 구성품을 완성한 이는 따로 있었다. 은행원 출신으로 묘조식품을 창업한 뒤 '자동 건조 장치'를 발명해 일본 건면 업계 정상에 올랐던 인물, 오쿠이 기요스미다. 1962년 면의 산패를 막겠다며 수프 별첨 라면을 출시했는데 이 방식이 그 후 대세가 됐다.

오쿠이는 어느날 재계 관계자의 요청으로 한국에서 온 기업인을 만난다. 그가 훗날 한국 라면사의 첫 페이지를 여는 삼양식품 창업주 전중윤 회장이다. 이북 출신의 전중윤은 한국전쟁 피난길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다. 동방생명 창업에 참여해 부사장까지 지냈지만 남대문시장에서 꿀꿀이죽의 실체를 보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때 일본에서 봤던 라면에 평생을 걸겠다는 다짐을 했다. 전중윤은 일본으로 넘어가 제면 기계 수입과 라인 조립, 공정 기술 협상을 시작했다. 손에 쥔 돈은 정부가 융통해준 5만달러가 전부였다. 여러 곳을 전전했지만 돌아온 건 턱없이 비싼 가격과 멸시였다. 마지막으로 연이 닿은 상대가 오쿠이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강렬했다('라면이 바다를 건넌 날, 무라야마 도시오'). 벚꽃 풍경에서 대화는 시작됐고 전쟁의 상흔을 기억하는 대목에선 둘 다 울먹했다. 에도시대 조선에서 활약했던 외교관 아메노모리 호슈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아메노모리가 남긴 '성(誠)과 신(信)의 교류'를 전중윤이 설명하자 오쿠이는 무릎을 쳤다. 자신도 몰랐던 일본 역사였다. 첫 만남 4개월 뒤 묘조식품의 제면 기계는 현해탄을 건너 서울 하월곡동 삼양식품 공장에 설치된다. 전중윤은 책상 서랍에서 오쿠이가 비서를 통해 몰래 건네준 수프 배합표를 꺼냈다. 한국산 라면은 그렇게 세상에 나왔다.

삼양라면이 출시되고 시장에 안착하기까진 시간이 걸렸다. 정부의 대대적인 혼분식 장려운동, 조국 근대화 정책으로 진행된 도시화 등을 거치며 제2의 주식으로 올라섰다. 전중윤의 회고에 따르면 수프에 고춧가루를 넣어보라고 제안한 이는 박정희 대통령이다. 한국의 라면은 매운 맛으로 거듭났고 후발 농심의 신라면 돌풍으로 시장은 더 불이 붙었다.

맛과 레시피는 계속 진화 중이다. 이제는 바다 건너 해외에서 더 열광한다. 삼양의 '불닭볶음면' 입수기가 SNS 화제 영상이 되고, 주문 폭주에 삼양은 추가 증설까지 나섰다. 라면 수출은 지난해 사상 첫 1조원 돌파에 이어 올 들어선 한달 수출 1억달러를 넘어섰다. 정부는 라면에 힘입어 올해 소비재 수출액이 1000억달러가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놨다.

라면 수출은 이미 1960년대부터 있었지만 별 감흥이 없었던 그때와 비교하면 그저 반가울 따름이다. K팝, K드라마, K콘텐츠가 지나간 자리에 K라면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난의 희망 끈에서 출발한 라면이 세계인의 놀이와 즐거움의 소비재가 된 것이다. 바다를 건너와 다시 바다를 건넌 한국 라면의 성공기는 교류와 융합의 정석으로 볼만하다.
소프트파워를 키우고 이를 소비재에 스며들게 하는 정교한 정책이 나와야 할 것이다. 제2, 제3의 라면이 수출 바통을 잇길 기대한다.
김, 떡볶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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