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간토 지역을 강타한 대지진은 10만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낳았다.
매해 9월 1일이면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 조선인 추모비에선 추도식이 열린다. 2006~2016년 실행위가 도쿄도에 추도문을 요청하면 해마다 빠지지 않고 도쿄도지사가 추도문을 보내 왔었다.
하지만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는 2017년 취임 이후 올해까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한 추도문을 발표하지 않았다. 2016년까지는 도지사가 매년 추도문을 발표했지만 이후로는 뚝 끊겼다.
고이케 지사는 간토대지진 희생자 추도문을 보냈기 때문에 조선인 학살 희생자에 대해 따로 추도문을 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조선인들은 일본인에 의해 학살된 것인데 어떻게 지진 희생자가 될 수 있을까. 말이 안 된다.
일본 정부도 이 끔찍한 사건을 외면했다. 101년이 지나도록 진정한 사과와 반성은커녕 사건 자체를 망각하려고 애썼다. 일본 정부와 고이케 도쿄도지사는 조선인 학살에 대해선 '뚜껑을 덮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여전히 명확한 사과와 반성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한일 관계의 발전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보수적 민족주의와 그에 편승한 정치적 계산의 결과일 것이다. 일본 정부와 고이케 도지사의 이러한 무시는 일본 내에서 일부 지지층의 환심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국제사회와 한국과의 관계에선 깊은 상처만 남길 뿐이다.
한일 양국은 오랜 역사적 갈등을 안고 있으나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과거사에 대한 명확한 정리가 선행돼야 한다. 일본 정치인들이 과거사 정리에 나서지 않으면 양국 간의 근본적 신뢰회복은 요원하다. 조선인 학살이나 강제징용 등 민감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일본 정부와 정치인들의 책임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반면 올해 간토대지진 기념식에 참석한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의 행보는 긍정적인 한 걸음이다. 이 기념식에 거물인 일본 전 총리가 참석한 것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한다. 그가 보여준 태도는 지금 양국에 필요한 리더십이라고 할 만하다.
일본 내부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학살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비판도 있다. 진보 성향의 아사히신문은 지난달 30일자 사설에서 8년째 추도문을 보내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고이케 도지사와 일본 정부의 문제점을 강하게 지적했다. 신문은 "부(허물)의 역사를 왜 외면하는가, 사실을 직시하고 교훈으로 삼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고이케 도지사가 조선인 학살 피해자를 모든 지진 희생자와 묶는 데에 대해서도 "학살은 천재와는 다르다. 고이케 도지사의 태도는 인정하기 싫은 과거를 묵살하는 학살 부정론과 통한다. 사실을 마주하고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계속 맹세하는 것의 그 중요함은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이 되는 해다. 이제 일본 정치인들이 '뚜껑'을 열어야 한다. 뚜껑 속에 한일 관계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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