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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포럼] 한류와 기업가정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9.05 18:45

수정 2024.09.05 18:50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작년 하반기부터 우리 주력상품의 글로벌 업황이 개선되면서 수출 호조세가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반도체가 수출실적 개선의 주역이지만 과거와 다른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소비재 수출의 가파른 상승세이다. 2023년 소비재 수출은 전년 대비 21.5%나 증가했고,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15%를 초과했다.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 소비재 수출 비중은 항상 10~12% 내에서 맴돌았으나 작년에 이 범위를 뛰어넘었고, 올해도 7월까지 수출로 보면 소비재 비중은 15%를 상회하고 있다. 이 같은 소비재 수출의 선전에는 글로벌 한류 열풍이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류 콘텐츠의 높은 인기가 세계 시장에서 한국 상품에 대한 호감도를 증가시켜 소비재 수출실적 개선으로 이어진 것이다. 수십년 동안 우리가 즐겨온 라면의 맛이 갑자기 변한 것도 아닌데 수출실적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 특히 소비재 상품은 대중이 가지는 인식 또는 호감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일시적 유행일 것이라는 일부의 폄하를 뚫고 한류가 지금의 글로벌 영향력을 가지게 된 비결을 두고 다양한 분석이 있지만 필자는 '기업화'를 그 핵심 원동력으로 평가한다. 한류 콘텐츠의 주축인 K팝의 경우를 보자. K팝 산업에서 기획사의 역할은 절대적이며, 음악 콘텐츠 생산은 매우 '기업적'으로 이뤄진다. 물론 서구 음악산업에서도 레이블이라고 통칭하는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K팝 기획사는 이들 회사보다 훨씬 기업화되어 있다. 마치 신입사원을 채용하듯이 자질이 있는 다수의 연습생을 선발해 수년간의 담금질을 통해 그중 선택된 일부만이 시장에 진출하는 K팝 시스템은 서구의 주류 엔터테인먼트 기업에서는 보기 힘들다. 마치 일반 기업이 신제품을 기획하듯 데뷔하는 아티스트의 이미지, 음악의 콘셉트 등을 사전에 철저히 기획하고 이 기획된 콘텐츠가 높은 제작비가 투입된 음반과 뮤직비디오를 통해 소비자에게 전달된다. 이 같은 시스템으로 인해 대부분의 경우 연습생들은 자신이 어떤 음악, 어떤 이미지로 데뷔하게 될지 처음에는 알 수 없다. 여러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에 K팝 연습생들은 보컬, 댄스, 외국어, 작사, 작곡, 연주 등 다양한 분야의 트레이닝을 받는다. 아이돌 데뷔를 위해 보컬·댄스 트레이닝을 받다가 최종적으로 록밴드로 데뷔하기도 하는 우리의 사례를 서구 음악산업에서는 찾기 힘들다.

과거 대중음악에서 서구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수십년 전의 필자에게 누가 '우리나라 노래가 미국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하는 것과 우리나라가 통일되는 것 중 어느 쪽이 빨리 이루어질까'를 질문한다면 당연히 통일이 먼저 될 것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K팝을 비판적으로 보는 서구의 평론가들은 '공장제' 시스템이라고 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화적 영향력이 미미했던 우리나라로서는 미국·유럽의 지배적 문화 헤게모니를 극복해야 했고, 이를 위해서는 대중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수 있는 최상의 상품을 만들어야 했으며, 그 필요성이 지금의 시스템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과정에서 창의적 아이디어를 기획사라는 조직을 통해 구현해 낸 '기업가정신'이 발휘되었다. 콘텐츠 사업은 고위험·고수익 사업이다. 고위험을 짊어질 수 있는 도전정신이 필요한 사업인 것이다.
현재 4대 대형기획사의 창업자들은 모두 사업 시작 전에도 이미 성공한 가수, 작곡가 등 아티스트 출신이었음에도 위험을 감수하면서 기업가로서 도전하여 지금의 결실을 맺었다. 사업의 성공을 추구했겠지만 정작 자신들도 이 정도까지의 글로벌한 성공을 예상치는 못했을 것이다.
한국 경제의 다른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는 기업가들도 한류의 성공으로부터 희망의 에너지를 받으시길 바란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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