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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숙 칼럼] 오죽하면 한은 총재가

최진숙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4.09.30 18:33

수정 2024.09.30 18:33

강남출신 입학 상한 제안
문제 풀이 무한반복 입시
개혁다운 개혁 서둘러야
최진숙 논설위원
최진숙 논설위원
참고서 저자들이 시대를 풍미한 시절이 있었다. 1950년대 말 안현필이 펴낸 '영어실력기초'는 500만부 이상 팔렸다. 제주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건너가 신문 배달을 하며 영어 공부를 했다. 돌아와 학원을 설립하고 여기서 직접 교재를 만들어 일약 갑부가 된 것이다. '성문종합영어'의 저자 송성문과 '수학의 정석' 홍성대는 1960년대 후반 학원가를 휩쓴다. 이들이 등장하는 새벽 서울 종로 바닥에 여학생들이 줄을 섰다는 일화도 있다.

학원가가 암흑기를 맞은 것은 신군부 등장과 함께다.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이 발표되면서 대형 학원들은 사대문 밖으로 밀려났다.
재원생 정원도 정부가 할당하는 방식이었다. 재학생 등록 금지조치까지 시행되자 대형학원은 재수생종합반으로 거듭난다.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서 학력고사 수석과 서울대생을 무더기로 배출했다. 종로학원, 대성학원의 전성기가 이 시기다.

전통의 학원들 위세는 영원할 것 같았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1994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처음 시행될 당시 학원가는 충격과 대혼돈이었다는 증언이 많다. IQ 테스트와 같은 문제 유형에 최대 5개 대학까지 지원 가능한 입시 전형은 재수생 프리미엄을 앗아갔다.

세상은 IT 혁명으로 소용돌이치면서 입시계 판도도 바뀌기 시작한다. 유명 저자의 참고서를 주교재로 한 학원 중심의 시장은 스타 인터넷 강사의 강의로 대체된다. 전국 방방곡곡 수험생들도 볼 수 있는 스타 강사의 온라인 강의는 지역 편차도 줄여줄 것으로 봤다. 이곳 시장이 다시 출렁이게 된 것은 시험 초기 종잡을 수 없었던 수능 문제들이 일정한 틀을 갖추던 2000년대 중·후반 시기와 맞물린다.

평가원이 변별력을 위해 난이도 상향 조정에 나서자 이를 정확히 조준하는 개인과 그룹이 등장한다. 이들 기반이 수험생 커뮤니티 사이트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2004년 서울대 의대생이 만든 사이트 '오르비'는 수능 고득점 수험생이 주축이었다. 인터넷 강사와 강의 평가를 공유하다가 누군가 자작 문제를 놀이 삼아 올릴 때만 해도 이 문제들이 억대 연봉을 가져올 콘텐츠가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오르비'와 비슷한 사이트의 고득점 N수생, 명문대 재학생, 졸업생 등 젊은 출제자들을 대거 흡수해 전문 저자를 길러낸 곳이 서울 강남 대치동의 시대인재학원이다. 교육스타트업을 표방한 시대인재는 필진들의 협업으로 문제들의 상향 평준화, 고도화를 이뤄낸다. 여기에 2014년 정부의 수능 응시과목 축소 발표는 시대인재 성장에 기름을 부었다. 고난도 문제 개발과 공급 시스템을 확립한 시대인재가 2017년 재수종합반을 문을 열고 이내 대치동 패권을 장악했다.

최근 출간된 '수능 해킹-사교육의 기술자들(창비)'의 저자 문호진은 시대인재의 부상은 사교육 패러다임 변혁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규정한다. 스타 저자, 스타 강사가 우위에 있던 사교육 시장이 콘텐츠 시대로 대전환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문항들이 지금도 대치동 곳곳에서 신진 필진들에 의해 주기적으로 생성된다. 원리를 깨치기보다 패턴을 체화하는 것이 목표다. 이런 식이면 3년간 문제를 푼 학생보다 4년간 푼 학생이 대체로 더 잘 풀 것이다. 대치동 입시반 연령이 6세까지 내려간 것도 이런 이유다. N수생 비율은 2024년 수능에서 35%로 28년 만에 최대였다. 인터넷 강의에 의존해온 지역 수험생들 1등급 비율은 갈수록 낮아진다.

이런 입시 전형을 확 바꾸자고 제안한 이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라는 사실은 신선하다. 외신 인터뷰에서 강남 출신 학생에겐 대학 입학 상한선을 둘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래야 집값도, 가계부채도 잡힌다는 것이다.
극단적 처방일 수도 있겠으나 지금 같은 경쟁이 모두에게 불행이고 경제 해악이라는 지적에 누가 토를 달 수 있겠나. 이 총재의 제안에 답은 교육부 장관이 해야 한다. 개혁다운 개혁은 시작도 못했다.
결국엔 공교육 재건에서 출발해야 한다.

jins@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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