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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광장] ESG를 넘어 지속가능성으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2.10 18:38

수정 2025.02.10 18:38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전 세계적인 ESG 열풍이 주춤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플로리다 등 몇몇 주가 정부 자금 투자 시 ESG 요소의 고려를 금지하는 정책을 입안했다. ESG 규제는 법원에서도 다퉈지고 있다. 2022년에는 여성 이사와 소수그룹 이사를 선임하도록 한 캘리포니아주 법률이 주 헌법상 평등 보호조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법원에서 효력이 정지됐다. 작년 12월에는 비슷한 내용의 나스닥 시장 규정이 연방항소법원에서 효력을 상실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작년 3월 발표한 기후공시 의무화 규정도 소송 과정에서 효력이 정지된 상태다.

이러한 경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공약집인 '어젠다 47'에는 퇴직연금을 ESG 투자에 활용하는 것을 금지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민주당 바이든 정부의 정책을 뒤집는 내용이다. ESG가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치쟁점으로 부각되자 ESG 투자의 선봉장이었던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은 정쟁화된 ESG 용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2023년 미국 연방대법원의 소수인종 우대정책에 대한 위헌 결정에 이어 트럼프 행정부가 다양성·형평성·포용성(DEI) 정책의 전면 폐지를 지시하자 메타, 아마존 등 기업들도 다양성 정책 폐기를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미국의 몇몇 은행과 증권사들이 넷제로 관련 협의체에서 탈퇴한다는 소식도 전해지고 있다.

미국의 변화가 정치적 이유로 인한 것이라면 유럽에서는 경제적 이유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유럽연합(EU)은 지난 몇 년간 전 세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ESG 관련 정책을 펼쳐 왔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2019년 첫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 친환경 정책을 통해 EU 기업의 경쟁력을 증진하고 관련 산업을 부흥시킬 것을 선언한 바 있다. 그런데 EU의 규제들이 유럽 기업들의 발목을 잡는다는 우려가 커지고, 중국 딥시크의 등장 등 유럽이 신기술 경쟁에서 도태된다는 위기의식도 고조되고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집권 2기에 접어든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달 경쟁력 회복을 위한 5개년 로드맵을 발표하면서 ESG 규제를 간소화할 것을 예고했다.

ESG 열풍이 수그러드는 것은 일부 ESG 정책이 기업 운영이나 금융투자의 기본원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ESG는 기업이 사회에 착한 일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사회 문제를 고려하는 것이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도움이 되고 투자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기업이 지속가능하게 발전하기 위해서는 매출, 영업이익 같은 단기 재무성과뿐만 아니라 환경·사회 변화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 인재양성, 기술개발과 같은 장기 비재무성과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런데 ESG가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이 아닌 환경, 인권, 노동 등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지나치게 넓게 사용되면서 ESG는 본래의 정신을 잃고 말았다.

따라서 ESG 대신 기업의 지속가능성 문제에 초점을 맞춰 그동안의 논의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기업이 혁신을 추진할 수 있는 인력과 기술을 지속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공급망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유지할 것인가, 기후변화가 기업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하고 대응할 것인가와 같이 회사와 투자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지속가능성 공시도 공급망에서 대응이 필요한 탄소배출 문제와 같이 회사와 투자자에게 재무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소를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업과 우리 경제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어떠한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한지, 정부나 법률이 할 일을 기업에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다시금 살펴봐야 한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