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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학배의 바다이야기] 말짱 도루묵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2.16 19:07

수정 2025.02.16 19:50

도루묵은 그자리 있는데
세상에서 올렸다 내렸다
정신 바짝차리고 살아야
前 해양수산부 차관
前 해양수산부 차관
이전에 추운 겨울이면 동해안에 지천이던 명태가 지금은 자취를 감추어 아주 귀하신 몸이 된 지 오래다. 우리가 먹는 생태와 동태는 모두 일본이나 러시아에서 온 것이다. 요즘 같은 겨울 동해에서 가장 흔한 생선은 바로 도루묵이다. '말짱 도루묵'이란 말이 있는데 어떤 일이 잘 풀리다가 한순간 그만 원래대로 되돌아간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나 삶에서 말짱 도루묵은 다반사이다.

그런데 이 도루묵은 그 맛이나 크기에 비해 이례적으로 임금에게 직접 이름을 하사받은 귀한(?) 물고기이다. 조선 인조 임금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식이란 학자가 있었다. 그는 유학자로서는 흔치 않게 도루묵에 관한 '환목어(還目魚)', 즉 '목어로 돌아간 물고기'라는 시를 남겼는데 그 시의 내용이 이렇다. 임진왜란 중에 선조 임금이 동해안까지 피란을 가게 되었는데 허기가 지자 '목어'라는 물고기를 반찬으로 허기를 때웠다. 그 물고기 맛이 일품이어서 '은어(銀魚)'라는 멋진 이름을 하사하고 매년 특산품으로 바치게 하였다. 그런데 선조가 임진왜란 후 한양으로 돌아와 다시 그 은어 맛을 보니 맛이 별로여서 하사했던 은어라는 이름을 삭탈하고 도로 목어로 부르게 하여 순식간에 귀한 생선에서 시원찮은 생선으로 푸대접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 방향으로 피란을 간 것이지 동해안으로는 간 적이 없다. 아마도 함경도나 강원도 방면으로 의병을 모으러 간 선조의 아들 임해군이나 순화군에 얽힌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여하튼 임금이든 왕자이든 또는 목어이든 묵어이든, 도루묵은 임금이 친히 지어준 영광스러운 이름 은어에서 삭탈관직(削奪官職)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름이 삭탈되고 원래 이름으로 돌아가 '도로 묵어'라 불리게 되었다. 바로 여기에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나왔다. 아마 이름이 삭탈관직당한(?) 전무후무한 물고기가 아닐까! 강원도에서는 '도루메기'라 불리는데, 씹으면 톡톡 터지는 알이 제맛이다.

흔하디흔한 이 작은 도루묵이 크고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우리 삶도 도루묵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때는 하늘에라도 올라갈 듯하다가 어느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기에 자신을 내려놓을 줄도 알고 어려운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된다'는 성경 구절이나 새옹지마(塞翁之馬)를 소환하지 않더라도 항상 겸손하고 성찰해야 함을 말해 준다. 그러기에 이식은 도루묵을 노래한 시 '환목어'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예로부터 잘나고 못난 것이 자기와는 상관없고, 귀하고 천한 것은 때에 따라 달라지네. 이름은 그저 겉치레에 불과한 것, 버림을 받은 것이 그대 탓이 아니라네. 넓고 푸른 저 바다 깊은 곳에서 유유자적함이 그대의 참모습 아니겠나."

동해안의 도루묵은 항상 그 자리에 있는데 우리가 도루묵을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으니 도루묵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식은 물고기 도루묵이 아니라 출세와 부를 좇아가기에 바빠 현실이란 삶 속에 파묻혀 귀한 무엇인가를 잊고 사는 우리 자신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세상일에만 너무 몰두하는 우리에게 잔잔한 울림을 주는 글이다. 더욱이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진흙탕 속 이전투구를 보면 오히려 도루묵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겨울이면 동해 바다에 어김없이 나타나는 물고기 도루묵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은어이든 도루묵이든 이렇듯 시의 대상이 되어 삶의 이치를 가르치고 있으니 대단한(?) 물고기 도루묵임에 틀림이 없다. 갑자기 '말짱 도루묵의 신세'가 부럽기까지 하다.


이제 설도, 입춘도 지났으니 계절이야 곧 봄소식을 전하겠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우리 마음속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그렇기에 한눈 잠깐 팔면 말짱 도루묵이 되어 버리는 이 세상이 더 야속하기만 하다.
요즘처럼 혼란한 때일수록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말짱 도루묵이 안 되려면 눈 크게 뜨고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멀쩡한 도루묵이 말짱 도루묵 되는 것이 한순간이기에!

前 해양수산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