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울=뉴스1) 정유진 기자 = 기괴한데 귀엽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미키 17'을 보고 난 뒤 남는 감상을 짧게 표현해 보라면 이렇다.
지난 17일 언론배급시사회를 통해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 처음 공개된 '미키 17'은 감독 특유의 유니크한 취향과 감성이 돋보이는 수작이었다.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드러내는 SF 장르 속 전형적인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이나 사건은 전형적이지 않아 흥미롭다.
영화의 주인공은 지구에서 실패한 인생을 산 미키(로버트 패틴슨 분)다. 미키는 친구 티모(스티븐 연)와 함께 한 마카롱 사업에 실패해 잔혹한 사채업자 다리우스 블라크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 들어선 그는 정치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 분)이 이끄는 행성 개척단이 되기 위해 신청서를 작성한다. 행성 개척단 안에는 여러 역할이 존재하는데, 그가 택한 역할은 '익스펜더블'(expendable, 소모용)이다.
익스펜더블은 휴먼 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죽어도 몸을 재생해 부활시킬 수 있는 인간이다. 계약서에 사인을 한 미키는 행성 개척단의 기술팀이 하는 온갖 실험의 대상이 된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으며, 기억까지 되살릴 수 있기 때문에 미키는 행성 개척단 안에서 아주 유용한 '실험용 쥐'처럼 활용된다. 매번 죽었다 살아나는 미키의 이름 뒤에는 번호가 붙는다. 미키 17은 16번 죽었다 살아난 미키에게 부여된 이름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 자신이 가진 특유의 순하고 얼빵한 캐릭터 때문에 미키는 개척단 안에서 그다지 존중받지 못한다. 절친인 티모조차 임무를 수행하던 중 미키가 위기에 처하자 그를 버리고 화염총만 챙긴다. 그는 어차피 재생할 수 있는 익스펜더블이므로. 그런 미키에게는 연인이 있다. 행성 개척단에서 군인과 경찰, 소방관까지 무려 세 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최고의 에이스 요원 나샤(나오미 애키 분)다. 나샤는 미키가 1부터 17이 될 때까지 변함없이 그의 옆을 지켰고,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그의 죽음의 순간들에 함께 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방사능에 노출돼 죽고, 실험용 약을 맞아 죽고, 얼음 행성에 있는 바이러스를 막는 백신 개발 과정에서 여러 차례 죽은 미키 17에게 또 한 번의 위기가 닥친다. 영화는 얼음 골짜기에 떨어져 벌레처럼 흉측하게(?) 생긴 외계 생명체를 맞닥뜨리게 된 미키 17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16번을 죽었다 살아났지만, 매번 익숙해질 수 없는 죽음. 외계 생명체에게 죽임당할 위기에 놓인 미키17이 점점 다가오는 그것을 보며 포기하는 마음이 되어갈 사이, 기술팀은 다시 새로운 미키, 미키 18을 프린팅한다.
'미키 17'은 귀여운 SF 영화다. 선량한 미키 17과 그런 그를 소모품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인간을 부품처럼 생각하는 현실을 반영한 풍자이지만, 그의 옆에는 그를 '미키 17'이 아닌 '미키 반스'로 생각해 주는 (대부분 여자인) 친구들이 있어 희망적이다. 영화 속 최악의 악당은-때때로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지는-흉측한 외모를 가진 외계 생명체가 아니라 마치 종교 집단처럼 맹목적인 추종자들을 키워내고 선동하는 독재자다. 그리고 아내 일파 마셜(토니 콜렛 분)과 그런 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남편인 독재자 케네스 마셜, 이 부부의 관계성은 한국 관객들에게는 조금 익숙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케네스 마셜의 캐릭터는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비슷하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예비 관객들이 예상하듯 '미키 17'은 할리우드식의 전형적인 SF 영화는 아니다. 우주 공간을 활용한다던가, 과학적인 요소가 있다던가, SF로서의 시각적인 재미를 추구한다든가 하는 작품도 아니다. '기생충'처럼 매 시퀀스에서 도파민이 터지는 사건들이 일어나지도 않고 SF임에도 약간 나른한 기운이 감돌고 중반부에 다소 느슨해지는 지점이 있다. 이는 호불호가 갈릴만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 그저 우주를 배경으로 한 봉준호 감독식의 동화 같다. 감독 특유의 날카로운 풍자, 계급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들어가 있지만 주를 이루는 화두는 사랑이나 희생, 소통과 이해 같은 '인간적인 것'에 대한 존중과 희망이다. 앞서 로버트 패틴슨의 내한 기자간담회에서 봉 감독이 영화에 대해 자신의 영화 경력 25년 최초로 "러브 스토리"를 넣었다고 표현했는데,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사랑이 중요한 영화다.
'미키 17'은 지금까지 나온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 가장 희망적인 작품일 것이다. 물론 결말 부에서 봉 감독다운 '비틀기'가 나오지만, 이마저도 장난스럽고 귀엽다. 이번 영화를 보고 나오는 관객들은 아마 안심하며 편안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설 가능성이 높다. 러닝 타임 137분. 오는 28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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