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30분 면담 10억 달러 요구
리더십 공백에 정부 대응 미흡한 탓
리더십 공백에 정부 대응 미흡한 탓

생색을 내듯 시간을 낸 자리에선 "한국 기업이 10억달러(1조4000억원)를 내면 익스프레스(급행) 서비스를 해주겠다"며 투자를 압박했다. 투자도 당장 1년 내 구체적인 성과가 나야 한다는 조건까지 달았다. 세계와 통상전쟁을 시작한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 기조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70년 동맹'의 가치가 이렇듯 내동댕이쳐지는 것에 비애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최 대한상의 회장 겸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대미 주요 수출품목인 자동차, 반도체, 철강, 조선 등 국내 핵심산업 대표 20여명이 동행한 사절단이다. 국가 리더십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기업이라도 나서서 한국의 위상과 역할을 다시 강조하겠다는 게 방미 목적이었다.
비상한 시기에 정부의 미진한 대응을 기업이 지원하고 양국 협력을 적극 모색해보자는 취지였으나 결국엔 뜻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 것이다. 정부 외교 리더십이 굳건하지 못할 때 민간이 어떤 대우를 받게 되는지 여실히 확인시켜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이 매년 미국에 무역흑자를 내는 것이 트럼프 정부는 불만일 수 있겠으나 한국 기업이 미국 경제에 기여한 공은 그에 못지않다. 트럼프 1기 때인 2017년 이후 8년간 우리 기업들이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1600억달러(약 230조원)에 이른다. 이를 통해 창출한 일자리가 80만개 이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미 흑자가 많은 것도 미국 공장이 한국에서 수입한 막대한 설비투자비와 관련성이 있다.
트럼프 정부는 이런 점을 도외시하면서 전임 바이든 정부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칩스법을 통해 약속한 보조금까지 흔들고 있다. 여기에 미국까지 찾아간 사절단을 박대하고 돈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으니 미국이 과연 우리의 우방인지 의심이 들 정도다. 결국엔 정부와 기업이 외교채널을 더 넓히고 힘을 합쳐 국익을 도모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번 사절단이 전혀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최 회장은 "가능하면 미국 측이 흥미를 가질 이야기를 했고, 이에 대해 상당한 반응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최 회장이 준비한 이야기는 조선, 에너지, 원자력, AI 반도체, 모빌리티, 소재부품장비 6개 분야 협력건이었다고 한다.
최 회장은 AI 분야 등은 미국 투자가 우리 기업에 훨씬 유리할 수 있다고도 했는데 윈윈 가능한 비즈니스는 찾기 나름일 것이다. 여기에 우리 기업 요구대로 미국의 인센티브가 뒷받침돼야 하는 것도 물론이다. 전임 정부에서 약속한 보조금 이행은 말할 것 없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정부가 더 민첩한 외교력을 발휘해야 한다. 기업은 철저히 실익을 따져 지혜롭게 대처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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