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법 오래전부터 세계화가 끝날 듯한 조짐은 보였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로 미국 금융시스템의 약점이 드러났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갈라지기 시작한 세계화 틈새는 더 벌어졌다.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출범은 확연한 신호였다. 미국인들이 "살기 힘들어서 더 이상 세계경영 못하겠다"는 걸 표로 확인해 줬다. 세계화를 유지해도 미국이 얻는 정치·경제적 실익은 적고 되레 손해를 보고 있다고 봤다. 미국 북동부와 중서부의 쇠락한 제조업 중심지를 일컫는 '러스트벨트'가 바닥 민심의 변화를 대변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러스트벨트의 전폭적 지지를 기반으로 두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취임 후 한달여 동안 관세 등 외교·통상부문에서만 14건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트레이드 마크 '관세폭탄'은 세계화를 대체하는 미국의 새 전략으로 자리매김했다. 국가별·품목별 관세에다 상호·보편 관세라는 4종 세트로 미국 중심의 새로운 무역질서를 만들려는 시도다. 이 같은 정책 기조가 트럼프 정부만의 전매특허도 아니다. 전임 바이든 대통령도 '인플레이션감축법' '칩스법'을 통해 미국 중심의 무역질서 강화에 집중해 왔다. '미국 제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구한다'는 목표였다. 중산층 재건과 보호무역 강화였다. 보조금 지급과 관세부과라는 정책적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같다.
관세가 지배하는 '역(逆)세계화' 시대다. 무역비중이 높은 우리 경제 특성에서 정부는 물론 기업, 개인까지 모든 경제주체는 대전환기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 트럼프 대통령 임기 4년을 견딘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폭탄 관세정책의 최초 설계자로 알려진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내놓은 저서 '자유무역이라는 환상(No Trade Is Free·무역은 공짜가 아니야)'은 이 같은 시각을 대변한다.
글로벌 경제는 상호의존성이 강하다. 관세장벽으로 독야청청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산업 측면에서 한정했을 때, 세계화라는 내공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면 경제시스템은 유지되기 힘들다. '다른 세계화'가 세계화를 대체할 것이다. 95%의 비전략적 무역품목은 기존의 공급망 시스템을 유지한다. 전략품목인 5% 정도는 동맹국 중심으로 새 공급망 시스템을 갖춘다. 전문가들의 예견 방향이다. 첨단·전략분야에서 중국을 배제한 후 미국 중심 공급망 구축이 핵심이다. 반도체, 인공지능(AI), 전기차 배터리, 의약품과 바이오산업이 해당된다.
세계화로 정책기조를 전환한 김영삼 정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초래한 원인 중 하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미국 주도 통상질서에 적시 편입하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우리나라가 세계화의 최대 수혜국이 됐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30여년 전을 되돌아봐야 한다. 미국 주도의 공급망 편승이 최우선 과제다. 정부와 기업은 미국 현지에 제조업 직접투자를 늘리되, 국내의 제조·연구개발 역량을 유지하는 정책을 공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한국 제조업 전반에서 AI 중심의 구조개편이 이뤄져야 한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는 반도체특별법 처리도 시급하다. '다른 세계화'는 목전에 와 있다. 자유주의 세계질서와 다자주의를 내세우고 민주주의 확산을 외치던 미국은 이제 없다. 일방적인 야만의 시대다. 흐름을 못 타면 국가, 기업, 개인 모두의 미래는 암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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