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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평범한 악'은 없다…신간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연합뉴스

입력 2025.02.26 08:01

수정 2025.02.26 08:01

세상에 '평범한 악'은 없다…신간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출처=연합뉴스)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 (출처=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임순현 기자 = "의식적으로 범죄자가 되려 하지 않더라도 생각 없음만으로 공범이 될 수 있다는 아렌트의 주장은 많은 범죄자에게 가장 좋은 변명거리가 되었습니다."
독일 철학자 베티나 슈탕네트가 2011년 출간한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글항아리)이 14년 만에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저자는 책에서 독일의 선배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년)에서 말한 '악의 평범성'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아렌트는 1961년 예루살렘 나치 전범재판을 참관한 뒤 나치 친위대 간부 아돌프 아이히만이 '악의 평범성'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관료였다고 분석했다.

반면 슈탕네트는 아렌트가 미처 살펴보지 못한 방대한 자료와 녹취록을 분석한 끝에 아이히만이 단순한 명령 수행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학살을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슈탕네트의 문제 제기는 아렌트가 예루살렘 재판을 통해 그려낸 아이히만의 모습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면서 시작했다. 그는 아이히만을 단순히 평범한 인간이자 사유 능력이 결여된 무능한 관료로 취급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그가 무자비한 학살자였음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 수집에 집중한다.

슈탕네트는 아이히만이 망명지인 아르헨티나에서 남긴 녹취록과 자필 원고, 예루살렘 법정에서의 심문 기록 등 총 8천쪽에 달하는 자료를 분석했다. 특히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 언론인과 나눈 1천300쪽 분량의 인터뷰 녹취록이 결정적인 증거가 됐다.

아이히만은 이 인터뷰에서 자기 과거를 거리낌 없이 드러내며 나치의 '유대인 말살 정책'을 적극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아돌프 아이히만(오른쪽)과 그를 체포한 모사드의 전직 요원 라피 에이탄 (출처=연합뉴스)
아돌프 아이히만(오른쪽)과 그를 체포한 모사드의 전직 요원 라피 에이탄 (출처=연합뉴스)

슈탕네트는 분석 결과 아렌트가 아이히만이 법정에서 보인 모습만을 보고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성급하게 도출했다고 지적했다. 아이히만의 재판 이전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가 철저한 신념을 바탕으로 유대인 학살을 계획하고 주도한 인물이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히만은 1942년 이후 독일 내 유대인 말살 정책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특히 헝가리 유대인 40만명을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작전을 지휘하며 학살을 주도했다.
전후에도 그는 나치 잔당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며 홀로코스트를 정당화하는 저서 활동을 이어갔다.

슈탕네트의 연구는 '사유 능력이 결여된 행정 관료'로만 알려졌던 아이히만의 본색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동시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아렌트의 철학이 아이히만의 진정한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린 경솔한 결론이었다고 비판한다.

이동기·이재규 옮김. 864쪽.

hyu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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