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 단편 '소란한 속삭임'·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베리에이션 루트'
[신간] 오래전 사랑이 바꿔놓은 것들…존 밴빌 '오래된 빛'예소연 단편 '소란한 속삭임'·아쿠타가와상 수상작 '베리에이션 루트'

(서울=연합뉴스) 황재하 기자 = ▲ 오래된 빛 = 존 밴빌 지음. 정영목 옮김.
"빌리 그레이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나는 그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다."
국내에 처음 번역 출간된 아일랜드 작가 존 밴빌의 장편소설 '오래된 빛' 첫 문장은 앞으로의 이야기를 요약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야기는 노년에 접어든 화자 앨릭스 클리브의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과거의 앨릭스는 열다섯살에 친구 어머니인 서른다섯 살 미시즈 그레이와 사랑에 빠진다. 앨릭스는 그때 느낀 열정과 죄책감을 되새긴다.
50여년이 지나 노년의 배우가 된 앨릭스는 딸 캐스가 죽은 뒤 실의에 빠진다. 그는 새 영화에서 젊은 여배우 돈 데번포드와 연기 호흡을 맞추는데, 그녀를 보며 죽은 딸을 떠올린다.
앨릭스 의식의 흐름을 따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전개 방식 때문에 책은 다소 혼란스럽게 읽힌다. 중심을 이루는 두 사건을 통해 앨릭스가 오래전 겪은 사랑이 그의 자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금씩 윤곽을 드러낸다.
존 밴빌은 2005년 부커상과 2011년 프란츠 카프카 문학상을 받았으며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거론된다.
문학동네. 380쪽.

▲ 소란한 속삭임 = 예소연 지음.
모아는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휴대전화로 시끄럽게 동영상을 보는 나이 든 남성을 보고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평소처럼 외면하려 한다.
그런데 시내라는 이름의 여자가 용감하게 나서 이 남성에게 "시끄럽다"며 말다툼을 벌이고, 모아는 얼떨결에 끼어들어 여성의 편을 들어준다.
결국 남성이 지하철에서 내리는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자 시내는 모아에게 '속삭이는 모임'에 가입하라고 권한다. 모임의 규칙은 비밀이 아닌 이야기를 서로 속삭이며 주고받는 것.
이 엉뚱한 모임에 가입한 모아는 무슨 말이든 속삭이게 되면 함부로 흘려들어선 안 될 중요한 말처럼 느껴지는 것에 신기해한다.
올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은 예소연 작가의 신작 단편소설 '소란한 속삭임' 줄거리다. 한 권에 하나의 단편을 담아 출간하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WEFIC) 81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예소연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시끄러운 세상에 속닥거리는 사람들이 어떤 힘을 가질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며 "속삭이기 위해서는 상대의 귓가에 다가가야 하고 그 상대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쩌면 그 몸짓에 대한 이야기를 제일 하고 싶었던 것도 같다"고 했다.
위즈덤하우스. 120쪽.

▲ 베리에이션 루트 = 마쓰나가 K 산조 지음. 김은모 옮김.
오래된 건물을 보수하는 직원 50명 규모 회사에서 일하는 하타는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기 위해 매달 한 번 주말에 등산하는 모임에 참여한다.
하타가 차츰 산에 매력을 느낄 때쯤 같은 회사의 베테랑 직원 메가가 등산 모임에 합류한다.
메가는 집착에 가까울 만큼 일에 골몰하는 사람으로, 평소 친절하다가도 업무가 미숙한 사람에게는 불같이 화를 낸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 관심이 없어 보이는 괴짜 같은 사람이다.
그런 메가는 산에 매우 익숙한 듯 지도에 없는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 오르는 일명 '베리에이션 루트'를 한다.
하타는 메가에게 호기심을 느끼며 가까워진다. 얼마 뒤 회사의 경영 상태가 나빠져 직원들 모두 근심하는데도 메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주말마다 산에 오른다. 하타가 회사 일을 걱정하자 메가는 "난 내 할 일을 할 뿐"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산은 일터 또는 사회의 상징으로 읽힌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메가의 등산 방법은 그가 주변의 평판, 회사의 형편을 고민하기보다 자기 역할과 의무를 우선하는 태도와 겹쳐 보인다.
'베리에이션 루트'는 2024년 신인 작가의 소설에 수여하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을 받은 작품이다. 마쓰나가 K 산조는 '재미있는 순문학'을 표방하며 문학성과 대중성을 모두 추구하는 작가다.
은행나무. 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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