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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 칼럼] 헌재,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2.26 18:11

수정 2025.02.26 18:11

절차적 정의 스스로 훼손
결정문에 달린 명예회복
소수의견까지 공개해야
노동일 주필
노동일 주필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오래전 자신의 회사 매니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받는 회사 중 하나라는) 명성을 쌓는 데는 37년이 걸렸지만, 명성을 무너뜨리는 데는 37분이면 족하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2024년은 공교롭게도 '1987년 헌법'부터 37년 되는 해이다. 실제로는 2시간 남짓이었지만 37분 만에 대한민국의 명성이 무너졌다는 상징적인 비유도 가능하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선진국이라는 자부심도 함께 무너졌다.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에 대한 신뢰가 깨진 것은 더 통탄할 노릇이다. 공수처, 검찰 등 수사기관의 무도한 법 집행이 대표적이다. 아직 현직 신분인 윤석열 대통령 체포·구속을 위해 온갖 불법·탈법을 자행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비상계엄을 내란죄로 만들기 위한 국회의 무리수도 문제이다. 국회의원을 끌어내라, 정치인을 체포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대한 진술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밝혀지고 있다. 야당 정치인들과의 합작으로 진술과 증거가 오염된 정황이 드러나는 중이다.

헌재의 주된 임무 중 하나는 이런 국가 공기관의 불법·탈법에 제동을 걸고 3권의 견제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상적이라면 국회가 내란죄 철회를 요청했을 때 신속한 각하 결정으로 재의결을 요구하는 게 바른 길이었다. 일부 재판관이 야당과 짬짜미로 철회를 권유(요구)했다는 말이 나오면서부터 헌재 심판의 권위는 훼손되기 시작했다. 허영 교수는 이를 포함, 헌재의 10가지 위법 사례를 들고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승복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만든 것은 적법절차의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헌재의 원죄 때문이다.

25일로 국회 측과 윤 대통령의 최후진술까지 끝났다. 본 난을 통해 여러 차례 절차적 정의를 무시하는 헌재의 각성을 촉구했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8대 0 인용이든, 4대 4 기각이든, 중간 어디쯤이든 희망적 주장일 뿐 헌재의 결정을 지켜보아야 한다. 단심인 헌재 결론에 승복하지 않을 도리도 없다. 헌재 결정문의 무게가 그만큼 무거운 이유이다. 무너진 헌재의 신뢰를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재판관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정밀한 결정을 내놓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잡을 길은 없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많은 비판에 대한 답을 내놓아야 할 의무가 있다. 8인의 헌법재판관 한 명 한 명이 헌법과 양심에 따른 성찰 결과를 겸허하고 진솔하게 결정문에 녹여내야 할 이유이다. 일부 재판관이 허겁지겁 진행한 재판절차 탓에 헌재의 이미지는 중대하게 훼손된 것이 사실이다. 실체적 내용마저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결론을 내린다면 일부의 공언처럼 헌재는 가루가 되어 사라질 수도 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결정'은 역사적 문서이다. 영구히 인용되고 비판의 대상이 될 결정문이다. 국민과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개인적 이념이 아니라 헌법과 법리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최고 법조인으로서의 양심과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한 글자라도 허투루 기록하지 않아야 한다. 소수 의견 없는 결정문이 나와서도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법 규정 미비라는 핑계로, 박근혜 대통령 탄핵은 억지로 만장일치를 유도했기 때문에 반대 의견이 기록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며 비판했던 부분이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문서에 소수 의견이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었다. 모든 재판관이 각자 펜을 들어야 한다. 국민이 의문을 가지는 쟁점마다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한 답변과 결론을 내놓아야 한다. 일각에서 걱정하는 내란 혹은 내전 가능성을 기우에 불과한 것으로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흔히 미국 연방대법관들을 일컬어 '지혜의 9기둥'이라고 한다.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헌재 재판관들 역시 그와 같이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심하게 훼손된 헌재의 명예 회복 역시 지금부터 숙고하고 집필하는 결정문에 달린 일이다.

dinoh7869@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