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주재 회의서 호통치며 반대하다 면직
자신을 '식지 않는 송장' 표현…고양시에 소박한 묘역만 남아
을사늑약 120년…끝까지 체결 반대한 애국지사 한규설 선생이토 히로부미 주재 회의서 호통치며 반대하다 면직
자신을 '식지 않는 송장' 표현…고양시에 소박한 묘역만 남아
(고양=연합뉴스) 노승혁 기자 = 1905년 11월17일 일본이 한반도 식민지화 계획의 예비 수단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이 올해로 체결 120년째를 맞는다.
조약 체결 당시 일본이 매수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등 소위 '을사오적'은 오랜 세월 많은 이에게 '매국노'의 대명사로 꼽혀왔다.
이들과 달리 지금의 총리에 해당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은 끝까지 반대한 애국지사다.

연합뉴스는 25일 오전 한규설 선생이 묻힌 경기 고양시 덕양구 원흥동 묘역을 찾았다.
1986년 6월 고양시 향토 유적 25호로 지정된 한 선생의 묘역은 자동차로 고양시청에서 출발해 고양대로를 이용, 원흥 지하차도 바로 전 오른쪽 편도 1차선의 구불구불한 도로를 돌아 1㎞를 더 가면 유진민속박물관이 나온다.
한 선생의 묘역은 박물관 뒤 80m 떨어진 산 중턱에 있으며 남쪽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묘역은 유족이 돌보고 있다고 한다.
묘역 입구에는 한 선생에 대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한 선생의 묘는 정경부인 박씨와의 합장묘로 봉분 주위로는 호석을 둘렀다.
특히 무궁화를 조각한 것이 마치 선생의 애국심을 나타내는 듯했고, 호석에 조각된 사군자 매란국죽과 묘비 및 상석, 석양 등 기물들의 정갈한 배치가 지조 높았던 선생의 성품을 느끼게 한다.
한 선생 묘역은 화려하지도 않고, 큰 규모도 아닌 평범한 묘지와 다름 없었다.

한 선생은 대한제국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맞딱뜨린 인물이다.
1904년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한일의정서(1904.02.23)와 제1차 한일협약(1904.8.22)을 체결해 대한제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이듬해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미국, 영국, 러시아와 각각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7.27), 제2차 영일동맹(1905.8.12), 포츠머스 조약(1905.9.5)을 차례로 체결해 대한제국에서 일본의 영향력 행사에 대한 강대국의 승인까지 받아냈다.
그 여세를 몰아 일제는 그해 11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대사로 파견, 을사늑약 체결을 추진했다.
한규설은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 회의에 참석했다.
을사늑약은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한 불평등 조약으로 원명은 '한일 협상조약'이며, '제2차 한일협약', '을사조약'이라고도 한다. 강제로 체결해 '늑약'이라고 했다.
주요 내용은 '조선의 모든 외교권은 일본에 양도 된다', '일본은 조선의 모든 외교적 문제에 대해 전권을 행사할 수 있다', '조선은 일본의 요구에 대해 어떠한 반대도 할 수 없다' 등이다.
한규설의 참모습은 회의 석상에서 잘 나타난다. 당시 조약이 체결됐던 덕수궁 중명전 회의에서 국권 침탈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홀로 상석에 앉아 회의를 주재하고, 주한 일본 공사로 을사늑약 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하야시 곤스케(林勸助)가 이토의 바로 오른편에 앉는다.
하야시 오른편으로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농상공부 대신 권중현, 군부대신 이근택이 차례로 자리했다. 맞은편 자리에는 외부대신 박제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 순이다.
회의에 참석한 8명의 대신 중 조약에 찬성한 이는 박제순, 이완용, 이지용, 권중현, 이근택 등이다.
이들은 나라를 넘긴 '을사오적'이라 불리게 됐다. 지금으로 보면 국가 핵심 내각이 매국 조약을 체결한 셈이다.
학부대신은 지금의 교육부 장관 성격이고, 내부대신은 행정안전부 장관 격이다. 외부대신과 군부대신은 각각 외교부와 국방부 장관으로 보면 된다.
농상공부는 농림축산식품부와 산업통상자원부를 합친 부처 장관이다.
반대한 이는 한규설, 이하영, 민영기 3명이었다. 그러나 이하영, 민영기는 을사늑약 체결 후 이내 친일파로 돌아서 친일 기구인 중추원 고문을 역임하고, 각각 자작, 남작 등의 작위를 받았다.
민영기, 이하영에 이어 이재극(궁내부대신·대통령비서실장)까지 가세해 을사늑약 후에 가장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했다. 이들은 '을사삼흉'이라 불린다.
한규설은 반대 의사를 끝까지 굽히지 않다가 세가 불리함을 깨닫고 회의 석상에서 통곡했다. 이 때문에 한규설은 중명전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중명전 마루방에 감금됐다가 나중에 면직된다.
중명전 회의장에서 한규설은 이토에게 "당신이 우리를 대포 앞이나 칼날 앞에 두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 앞에 두었는데, 어떻게 당신의 협박이나 생사의 위협이 나를 움직이겠는가?"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또 "사직은 무겁고, 임금이 가벼우니 비록 칙령이 내려졌다 해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의 언행은 이후에도 한결같았다.

그는 1930년 1월1일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스스로를 '미랭시(未冷屍·식지 않은 송장)'로 표현했다.
"나는 '미랭시'요. 산송장이나 다름없소. 을사년 이후 말도, 듣지도 않으려 했더니…."
한규설은 1910년 국권피탈 이후 조선총독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수여 받았으나 거절했다.
1920년 이상재 등과 조선교육회를 창립해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펼쳤고 민립대학기성회를 만들어 교육 발전을 통한 국권 회복을 시도했지만,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그 뒤 스스로를 죄인이라 하며 칩거하다 1930년 11월8일 타계하면서 "나는 죄인이니 부고를 내지도 말고, 장례도 간단하게 치르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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