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안평의 흩어진 꿈, 이생의 낙원에서 훨훨 날아오르다

장인서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3.03 14:27

수정 2025.03.03 14:27

국립창극단의 올해 첫 작품 '보허자'
3월 13~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에서 각각 수양, 안평 역을 맡은 이광복과 김준수(왼쪽부터). 국립창극단 제공
국립창극단의 창작 창극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에서 각각 수양, 안평 역을 맡은 이광복과 김준수(왼쪽부터). 국립창극단 제공

조선 제7대 왕 세조(수양대군)와 그의 권력욕에 희생된 안평대군을 소재로 한 창작 창극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가 오는 13~2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른다.

올해 국립창극단의 첫 공연이자 초연작인 '보허자'는 역사적 일화에 소설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이다. 김정 연출가와 배삼식 작가, 작창과 작곡을 맡은 한승석 예술감독 등 베테랑 창작진이 의기투합한 가운데 우리 음악에 한국 고유의 정서를 담아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김정 연출은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보허자' 연습실 공개 현장에서 "비극으로 인해 다치고 상처받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꼬여 있던 관계들을 풀어내며 위안을 주는 작품"이라며 "관객들이 구체적인 메시지를 얻기보단 각자의 삶에서 본인 의지와 무관하게 너무 일찍 잃어버린 관계들을 따뜻하게 떠올리고, 또 보내줄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보허자'는 고려시대 송나라에서 전래돼 고려와 조선의 궁중음악으로 수용된 악곡 중 하나로, 듣는 이의 무병장수와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

반면, 이번 작품에서는 자유롭고 평온한 삶을 동경하지만 실제로는 현실에 얽매여 발 디딜 곳 없이 허공을 거니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의 제작을 맡은 김정 연출가. 연합뉴스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의 제작을 맡은 김정 연출가.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신작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 연습실 공개 현장에서 출연진이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7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신작 '보허자: 허공을 걷는 자' 연습실 공개 현장에서 출연진이 주요 장면을 시연하고 있다. 연합뉴스

창극 '보허자'는 계유정난 비극이 벌어진지 27년 후인 1480년(성종 11년)을 시점으로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안평의 딸이자 유일한 혈육이었던 무심(無心)은 변방에서 오랜 노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다. 안평을 모시던 화가 안견은 안평의 첩이었다가 관노비가 된 후 불의의 사고로 몸과 마음을 다친 대어향(對御香)을 찾아내 남몰래 거두고, 무심을 만나기 위해 수소문한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폐허가 된 옛집 수성궁 터에서 마주쳐 회포를 풀며 추억을 나눈다.

그 가운데 안평을 기억한다는 이름 모를 나그네(안평)가 대화에 끼어든다. 나그네의 어깨에는 그의 눈에만 보이는 혼령(수양)이 붙어있다. 이들은 안평이 꿈에서 본 낙원을 그린 '몽유도원도'가 보관된 왕실의 원찰 대자암으로 함께 여정을 떠나고, 그 속에서 갈망했던 옛꿈을 마주한다.

극본을 맡은 배삼식 작가는 수양과 안평을 둘러싼 정치적 입장보다는 삶이 무참하게 꺾인 인물들의 모습에 주목하고, 각 인물이 지닌 자유로운 삶에 대한 열망, 그럼에도 진흙탕 같은 현실의 무거움을 대조적으로 펼쳐낸다.

배 작가는 "'보허자'는 불가능한 꿈에 대한 이야기"라면서 "우리 존재는 무겁지만 마음 만큼은 한없이 가볍고 자유로워져 허공으로 나풀나풀 솟아올라 신선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갈망을 다룬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 공연 포스터. 국립창극단 제공
'보허자(步虛子): 허공을 걷는 자' 공연 포스터. 국립창극단 제공

이번 공연에는 한승석 교수와 더불어 장서윤이 작곡에 참여해 인물들의 비극적 삶을 세밀한 음악으로 표현한다. 전통악기로는 가야금·거문고·대금·해금·아쟁·생황 등이 두루 쓰인다. 아름다운 시어로 구성된 가사에 전통적인 선율과 장단, 가상악기 사운드를 조화시켜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을 예정이다.

무대디자인은 이태섭이 맡아 비극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꿈의 폐허'를 거친 분위기로 그리고, 현대무용 안무가 권령은은 특유의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인 움직임으로 등장인물의 심리를 정교하게 구현한다.


세대를 아우르는 캐스팅도 주목할 만하다. 나그네(안평) 역은 창극 '리어'에서 30대 나이로 80대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한 김준수가 맡았다.
이외에 김금미(본공·도창), 이광복(수양), 민은경(무심), 김미진(대어향), 유태평양(안견)과 코러스를 맡은 창극단 단원 16명이 무대에 오른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