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숙 칼럼] 유럽의 우울
경악스런 美·우크라 회동
쇠락한 유럽 카드가 없다
다음 딜 우린 다를 수 있나
"오바마를 보고 있으면 내가 어렸을 때 존경하던 사람들과 비슷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J D 밴스 미국 부통령을 단숨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끌어올린 회고록 '힐빌리의 노래(2016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명확하고 완벽하게 표준발음을 구사하는 오바마의 억양은 밴스에게 생경했다. 현대 미국의 엘리트 사회를 자신의 것으로 확신하고 행동하는 오바마를 향해 불편과 거부감도 숨기지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밴스를 눈여겨본 것도 이때부터다.
밴스를 키운 이는 약물중독 어머니와 집 나간 아버지를 대신했던 외조부모다. 미국 중부 가난한 동네에서 자라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벤처투자자로 부를 이룬 과정은 기적에 가깝다. 성공한 사업가로 어느 날 켄터키 시골 동네를 들렀을 때 그는 어린 밴스와 비슷한 아이를 만난다.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음식을 조금 더 먹고 싶다는 말조차 못 하는 아이들. 신이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그가 정치의 길을 가게 된 계기로 볼 수 있다.
부통령 후보 시절 여러 설화로 화제의 중심에 섰지만 트럼프 정부 출범 후엔 의외로 존재감이 미약했던 밴스가 다시 미국 정가의 초점이 됐다. 충격의 미국·우크라이나 양국 대통령 회동을 파탄 낸 결정적 인물로 급부상한 것이다. 현대 정치사에 길이 남을 이 회동의 마지막 10분 무대를 열어준 이가 다들 보았듯이 밴스다. 양말 위로 다리를 드러낸 채 고압적인 자세로 앉아 전쟁 중인 힘없는 나라의 대통령을 향해 "무례하다"고 꾸짖은 부통령. 확실한 트럼프 2인자로 각인된 순간이라 할 만했다.
우크라이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을 벼랑 끝으로 몰려는 트럼프가 전체를 기획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확실치 않다. 젤렌스키가 (러시아로부터 지켜줄) 미국과 유럽 사이의 '멋진 바다(대서양)'라는 단어를 내뱉는 순간부터 트럼프는 본격 참전한다. 거침없이 쏟아진 트럼프의 발언은 "감사함을 표하라, 당신은 카드가 없다"로 요약될 것이다.
이 자리가 우발적이었든 계획적이었든 주목해야 하는 건 트럼프의 본심이다. 카드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로 등급을 매기는 냉혹한 딜러의 본능을 다들 다시금 보았다. 중국 패권을 제어하기 위해 러시아를 회유하려는 이른바 '역닉슨 전략'을 구사 중인 트럼프에게 러시아는 카드가 많은 나라다. 고립에 지친 러시아가 중국과 민감한 군사협력을 중단하고 종전 후 대유럽 가스 수출 기회도 미국에 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밴스가 던진 미끼를 젤렌스키가 물지 않았다면 달랐을까. 큰 변수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간에 쫓기는 쪽은 동부전선에서 고전 중인 우크라이나다. 유럽의 지원도 이제 힘에 부친다. 대서양 동맹에 대한 트럼프의 인식은 밴스의 지난달 독일 뮌헨 안보회의 발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러시아가 당신들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나? 당신들이 더 문제"라는 말에 유럽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국의 새 판 짜기는 유럽의 쇠락과 무관치 않다. 유럽 경제력은 최근 20년 새 말할 수 없이 쪼그라들었다. 한때 미국과 대등한 경제규모였으나 이제는 유럽연합(EU) 27개국 국내총생산(GDP)을 다 합쳐도 중국보다 밑이다. 대안 없는 원전 철회로 에너지 값은 치솟았고, 기득권 저항에 '복지병' 수술은 매번 실패했다. 무엇보다 기존 산업을 지키려고 신기술 규제 족쇄를 씌운 것이 뼈아픈 실책이다. 미국 빅테크와 중국 자동차에 시장이 초토화됐다. 유럽의 맹주 독일과 프랑스는 지난해 나란히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자강론이 힘을 내지 못하는 이유다. 유럽도 내밀 카드가 없다.
"이 좁은, 그러나 혐오 가득한 세계에서 비탄의 쉰내를 맡는다. " 19세기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의 산문시('파리의 우울'중 '이중의 방')에 나온다. 변방으로 밀린 지금 유럽은 당시의 보들레르와 비슷한 심정일 수 있다. 트럼프 다음 딜의 상대인 우리는 다를 것인가. 만반의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