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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말저런글] 『추사 글씨』, 그리고 권력

연합뉴스

입력 2025.04.14 05:55

수정 2025.04.14 05:55

[이런말저런글] 『추사 글씨』, 그리고 권력

<진 군은 추사 글씨에 대한 감식안이 높을 뿐 아니라 일반 서화 고동(古銅)에 대가로 자처하는 친구다. 양 군도 진 군 못지 않게 서화 애호의 벽이 대단한데다 금상첨화로 손수 그림까지 그리는 화가인지라 내심으로는 항상 진 군의 감식안을 은근히 비웃고 있는 터였다.

벌써 5, 6년 전엔가 진 군이 거금을 던져 추사의 대련(對聯)을 한 벌 구해 놓고 장안 안에는 나만한 완당서를 가진 사람이 없다고 늘 뽐내고 있었다. 그런데 양 군의 말에 의하면 진 군이 가진 완서는 위조라는 것이다. 이 위조라는 말도 진 군을 대면할 때는 결코 하는 것이 아니니, "진 형의 완서는 일품이지." 하고 격찬을 할지언정 위조란 말은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진이 그 소식을 못 들을 리 없다. 기실 진은 속으로는 무척 긴장을 했다. 자기가 가진 것이 위조라? 하긴 그럴지도 몰라. 어쩐지 먹빛이 좋지 않고 옳을 가(可)자의 건너 그은 획이 이상하더라니……. 감식안이 높은 진 군은 의심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후 이 글씨가 누구의 사랑에서 호사를 하고 있는지 몰랐는데, 최근에 들으니까 어떤 경로를 밟아 어떻게 간 것인지는 모르나 진 군이 가졌던 추사 글씨는 위조라고 비웃던 양 군의 사랑에 버젓하게 걸려 있고 진 군은 그 글씨를 도로 팔라고 매일같이 조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추사 글씨란 아무튼 대단한 것인가 보다.>

세한도 (출처=연합뉴스)
세한도 (출처=연합뉴스)


김용준의 수필 『추사 글씨』 한 대목입니다. 건너뜀 많은 인용입니다. 그런데도 건질 낱말이 제법 보입니다. 일단 추사는 조선 후기 그 유명한 인물, 김정희가 맞습니다. 완당, 추사, 시암, 예당, 노과, 농장인, 천축고선생 등 호가 많기도 많습니다. 감식안은 어떤 사물의 가치나 진의를 알아내는 눈입니다. [고동]은 고대의 구리, 오래된 동전을 말하고요. [대련]은 문이나 기둥에 써 붙이는 대구(對句. 비슷한 어조나 어세를 가진 것으로 짝 지은 둘 이상의 글귀)랍니다. 장안은 서울이고 완당서와 완서는 둘 다 추사 글씨를 일컫습니다. 호사는 호화롭게 사치함 또는 그런 사치로 풀이하고요.

한 국어책은 '표면적으로는 추사 글씨의 예술적 가치를 예찬하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예술 작품을 대하는 속물적 태도에 대한 비판이 숨겨져 있는 수필'이라고 작품을 평합니다. 예술 작품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즐기기보다 그 명성이나 경제적 가치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세태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 있다고 하면서요.

[추사 글씨] 자리에 [권력]을 놓고 살을 붙여 새롭게 써봅니다. '겉으로는 권력의 대국민 봉사 가치를 우러러보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권력이 가져다주는 명성과 실익에 훨씬 관심이 많아 보이는 세태에 대한 풍자.' 이거, 공감할 수 있는 변주일까요? 어쨌든 분명한 것은 하나 있습니다. "권력이란 아무튼 대단한 것인가 보다" 하는 바꿔쓰기는 무리한 것이 아니리라는 점 말입니다.

김정희 '계산무진(谿山無盡)' (출처=연합뉴스)
김정희 '계산무진(谿山無盡)' (출처=연합뉴스)


≪1분 뒤에 로또 추첨 방송이 시작됩니다. 1등 상금이 100원입니다. A는 화끈하게 약속합니다. "1등 당첨되면 어려운 이웃 돕기에 전액 쓰겠습니다." 이 사람 가만보니까, 로또를 사지도 않은 채 저렇게 말하는 거네요. 고민 끝에 하는 말인 양하며 B는 또, "전액은 못 하겠고요. 절반만 기부하겠습니다"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안 샀다네요. 다만, 로또 판매점이 편도 30초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이거, 다행일까요? ≫

대통령 하겠다는 사람들이 쏟아집니다.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거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이들조차 그러는 현실을 개탄하는 소리가 예서제서 들립니다. ≪ ≫ 로또 이야기는 그런 일부 세태에 관한 B급 풍자입니다.
선용하든 악용하든 오남용하든 권력이 추사 글씨와 비슷한 면이 있다면, 그것을 대하는 자세도 유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데 진, 양 군과 A, B의 태도가 다른 것은 왜일까요? 진, 양에게 추사 글씨는 이만큼 가까이 있고 A, B에게 권력은 저만큼 멀리 있는 것 같지요, 아마. 쉬운 퀴즈였습니다.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김정희의 글씨 '침계' (출처=연합뉴스)
김정희의 글씨 '침계' (출처=연합뉴스)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꿈을담는틀 편집부(엮은이), 『현대산문의 모든 것』, 2008, pp.700-701. (김용준의 『근원 수필』에 수록된 작품 해설 등 인용)
2.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온라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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