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장애인상 수상자 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장
어려웠던 집…22세 일하다 감전 사고로 양팔·한 다리 절단
골목 지나가다 본 컴퓨터…"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생각"
컴퓨터 조립·판매업 중 IMF…"노력하면 항상 돕는 사람 있어"
교정위원으로도 활동…"재소자들, 날 보고 '나도 살아야지'"
21년 박사 학위까지 취득 "내가 원하는 것 처음 스스로 성취"
광화문서 경북 경산까지 도보 종주 "차 세워 음료 주는 이도"
![[경산=뉴시스] 구무서 기자 = 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장이 의족과 다리를 이용해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는 모습 2025.04.18. nowest@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8/202504181300395609_l.jpg)
[서울=뉴시스] 구무서 기자 = 20대에 사고로 양팔과 한쪽 다리를 잃었지만 비장애인도 하기 어려운 박사 학위 취득과 전국 종주까지 이뤄낸 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장은 자신을 보고 이 사회에 더 많은 희망이 퍼져나가길 소망했다.
2남 4녀 중 장남이었던 이 회장은 어려웠던 가정 환경에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다. 온 가족이 벌목을 해서 추위를 피해야 했고 집이 없어 천막을 치고 죽을 끓여먹으며 지내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던 22세 나이에 일을 하던 중 전기 감전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이 회장은 두 팔과 한 쪽 다리를 잘라내야 했다.
이 회장은 "내 20대는 굉장히 암울했다. 삶의 지향점이 꺾이고 삶에 대한 애착 자체가 사라졌다"고 떠올렸다.
그러던 이 회장을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그는 "눈이 많이 쌓이던 날이 있었는데 그 눈 속에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이범식이 참 불쌍하구나, 그래도 살아봐야하지 않겠나, 내가 장남인데 가족들은 어떻게 하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며 "가장 힘든 시기가 지나간 이후로는 억지로도 웃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일상에 적응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 회장은 "퇴원 후에는 생활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남한테 의존하는 삶이 되니 그 자체가 힘들었고 맨날 부탁을 해야 하니 바깥에는 잘 안 나가게 됐다. 남한테 내 모습도 보이기 싫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을 '로보캅'에 비유했다. 의족과 의수를 끼고 두터운 외투를 입어 장애를 가리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 회장이 다시 사회와 연결된 매개체는 컴퓨터였다. 그는 "29살까지 사회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가 경산에 있는 가구 골목을 지나가는데 컴퓨터가 눈에 들어왔다"며 "발가락으로 키보드를 치면 먹고 살 수는 있겠구나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이범식 한국장애인IT복지협회장이 지난해 전국 종주 중 휴식을 취하는 모습. (사진=서보균 전 경주교도소장 제공) 2025.04.18. nowest@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https://image.fnnews.com/resource/media/image/2025/04/18/202504181300407507_l.jpg)
컴퓨터를 배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장애인이었던 이 회장을 가르치려는 학원이 없어 발품을 팔아 겨우 한 곳을 찾아냈다. 정식 수업은 아니었고 수업 이후에 별도로 진행하는 수업이었지만 이 회장의 진심을 알고 학원비도 받지 않고 강의를 해줬다.
그렇게 컴퓨터 실력을 쌓은 이 회장은 지인의 부탁으로 총무·회계 일을 시작했다. 이 회장은 "경산에서 대구까지 출퇴근을 해야 했는데 대소변이 가장 문제였다"면서도 "그런걸 생각하면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그런 어려움을 생각하지 말고 일단 나가야 한다"고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이 회장도 오래 근무할 수 없었다. 이 회장은 "회사가 어려워지니 가장 먼저 해고가 됐다"며 "그때 처음으로 장애인으로서 밀려난 경험을 하게 돼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컴퓨터 조립·판매업을 시작했지만 IMF가 터졌다. 사채까지 썼지만 버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 회장은 "노력을 하면 항상 사람이 있다. 그때도 날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며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을 하자고 해서 시작한 게 장애인 컴퓨터 방문 강사였다"고 했다.
일을 다시 시작한 이 회장은 2003년 경산에 장애인정보화지원센터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치고 기증 받은 컴퓨터를 나눠주는 활동을 하게 된다.
이 시기 방송 출연과 함께 대구구치소에서 교정 위원으로도 활동을 한다. 이 회장은 "재소자 컴퓨터 교육을 하는데, 거기 가면 20대 애들인데 자기만 세상에 버림받은 줄 알고 사는 애들이 많아 자살 시도도 많았다"며 "그런 애들이 나를 보면 놀란다. 저 사람도 저렇게 살아가는데 나도 살아야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수용자 자살시도자가 저절로 줄었다"고 말했다.
당시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이었던 서보균 전 경주교도소장은 "당시 교도소에서 자살자가 3분의 1로 줄었다"며 "이 회장을 만나서 나서 생명을 버리려던 젊은 수용자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던 이 회장은 스스로의 도전에도 나섰다. 2011년 공부를 시작해 2021년 박사 학위를 딴 것이다. 그는 "장애인으로서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걸 스스로 성취한 것"이라며 "삶에 자신감이 붙었다"고 했다. 지금도 강사로 교단에 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이 회장은 컴퓨터를 배우던 시절 채팅을 통해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이 회장은 "한 여름에도 항상 외투를 걸쳤다. 그게 날 지켜주는 성과 같았다. 그런데 아내를 만나면서부터 벗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아내가 간경화에 걸리자 간을 이식할 수 있게 건강 관리를 시작했다. 그렇게 운동을 시작한 이 회장은 의족을 통해 하루 2만보 이상, 400m 달리기까지 가능하다.
이 같은 성과에 힘입어 지난해에는 서울 광화문에서 경북 경산까지 도보로 종주를 했다. 이 회장은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며 "정말 힘들었는데 가다가 차를 세워 음료를 주는 사람도 있고 응원을 해주는 사람들이 많더라. 다음에는 도움이 된다면 남북 평화통일을 위해 DMZ도 걷고 싶다"고 했다.
이 회장은 "무언가를 보여주는 실천가가 되고 싶다. 이 세상에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며 "내가 행동하는 이 날개짓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기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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