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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 국민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든 정권에 분노하다 [역사&오늘]

뉴스1

입력 2025.04.19 06:01

수정 2025.04.19 09:14

4·19 혁명. (출처: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1942,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4·19 혁명. (출처: National Museum of the U.S. Navy, 1942,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60년 4월 19일, 우리나라에서 4.19 혁명의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승만 정권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 그리고 3.15 부정선거라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사건에 분노한 학생과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혁명의 도화선은 1960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및 부통령 선거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조직적인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투표함 바꿔치기, 유령 유권자 동원, 공개 투표 강요 등 상상을 초월하는 부정행위가 전국적으로 자행됐고, 이는 국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이승만 정권의 권위주의적인 통치와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시민들은 부정선거라는 명백한 민주주의 파괴 행위에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특히 학생들은 불의에 맞서 가장 먼저 거리로 나섰다. 2월 28일 대구에서 시작된 학생 시위는 3.15 부정선거 이후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벌이고 귀교하던 중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는 '4.18 고려대 학생 피습 사건'을 겪으며 더욱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 사건은 전국 대학생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며 4.19 혁명의 결정적인 기폭제가 되었다.

마침내 4월 19일, '피의 화요일'로 불리는 이날,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이승만 하야", "독재 타도", "부정선거 다시 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경찰은 무자비한 발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으나, 시민들의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열망을 꺾을 수는 없었다.


이날 하루 동안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더욱 거세졌다. 4월 25일에는 대학 교수단까지 시위에 동참하며 이승만 정권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였다.
마침내 4월 26일, 거센 국민적 저항과 군부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발표, 12년간의 정권은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