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아시아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 선진국으로 만들어놔"
"김대중, 1960년대부터 민주주의 국가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 가장큰 문제는 극복하기 어려운 빈곤"…소련 386 출신 란코프 교수 인터뷰
[삶] "한국기여 1위 단연 박정희, 2위 김대중…이승만 기여 크지않아""박정희, 아시아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 선진국으로 만들어놔"
"김대중, 1960년대부터 민주주의 국가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 가장큰 문제는 극복하기 어려운 빈곤"…소련 386 출신 란코프 교수 인터뷰
[※ 편집자 주=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 교수의 인터뷰 기사는 분량이 많아 5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이 두 번째 기사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지난 4월 22일 [삶] "나는 소련 386 학생운동권 출신…한국 386은 완전 거꾸로 갔다"라는 제목으로 송고됐습니다. 다음 주에 나가는 세 번째 기사는 남북한의 핵무장 문제, 그다음 주의 네 번째 기사는 미-중 대립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다룹니다. 다섯번째 기사는 남북 통일문제 등을 담을 예정입니다.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한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사람 1순위는 단연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었습니다. 객관적 역사학자라면 그의 성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으로 기여한 사람은 김대중 대통령으로, 젊은 시절인 1960년대부터 민주화에 노력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의 발전에 기여한 게 크지 않다고 판단합니다. 남한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출범한 것은 미국 영향의 결과이지, 이 대통령이 만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드레이 란코프(61) 국민대 교수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연합뉴스는 지난 3월 20일부터 시작해서 4차례에 걸쳐 란코프 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란코프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었다"면서 "그것은 잘사는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라고 했다.
란코프 교수는 "1980년대에 유학생 신분으로 평양에 가보니 북한 주민들은 친절했고, 낭만을 즐겼고, 야심이 있는 젊은 학생들도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남한과 달리 극복하기 어려운 빈곤함이 있었다"고 했다.
1963년 상트페테르부르크(당시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난 란코프 교수는 1980년 레닌그라드 대학교 중국역사학과에 입학했다. 1984년 9월부터 10개월간 북한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그는 1992년부터 4년간 한국의 오산대학교, 중앙대학교에서 러시아어 강의를 했고, 1996년부터 8년간 호주 국립대학교에서 중국·한국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했다. 2004년부터 국민대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하면서 북한학 등에 대해 강의 중이다.
란코프 교수는 2013년에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만나 대북 정책에 대해 자기 의견을 제시했던 학자로, 뛰어난 한반도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모교에서 한국의 4색 당파를 주제로 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란코프 교수 인터뷰의 1차 기사 요약>
[삶] "나는 소련 386 학생운동권 출신…한국 386은 완전 거꾸로 갔다"(2025년 4월22일 송고)
나는 1980년대에 소련(러시아)의 국립 레닌그라드 대학교(현재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에 다녔고 동아리 활동도 했다. 한마디로 소련의 386 운동권 학생이었다. 당시 소련의 운동권 학생들은 시장경제와 자유 민주주의를 진보로 판단했고 이를 위해 싸웠다.
나는 15∼16세 무렵인 1970년대 후반기에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될 것으로 예상했다. 소련의 교사와 교수들, 국민들도 마르크스, 레닌의 사회주의 논리를 믿지 않았다. 매일 직면하는 현실이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입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시기인 1980년대에 한국의 학생들은 사회주의 건설을 목표로 투쟁했다. 학생운동권은 소련의 국가사회주의 정치경제 시스템을 지향하는 PD(민중민주) 계열과 북한을 모델로 하는 NL(민족해방) 계열로 양분돼 운동을 전개했다. 두 계열 모두 남한에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한국의 학생운동권이 이렇게 거꾸로 간 것은 해외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보지 못하고 빈부 격차 등에 집중한 것도 당시 학생운동권이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던 이유 중의 하나다.
나는 동아시아 역사학자로서 세계 역사에서 한국처럼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룬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안다.
오늘날의 진보는 기술 발전을 포함한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좀 더 평등한 분배가 이뤄지고, 인권과 자유가 개선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경제 발전과 기술 발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소련, 동유럽, 북한 등의 사회주의에서 문제가 생긴 것은 경제 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란코프 교수 인터뷰 2차 기사의 질문-응답>
-- 본인은 1980년에 당시 레닌그라드 대학교 아시아학부 중국 역사학과에 지원했는데, 이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 나는 초중고 때도 중국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관련 책도 많이 읽었다. 나는 중국 역사를 배우기 위해 레닌그라드대학교 아시아학부에 입학하기로 결정했으나 쉬운 것은 아니었다. 입시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당시 소련에서는 지금의 북한처럼 외교관과 무역일꾼(무역회사 직원) 등이 인기를 끌었다. 상대적으로 돈을 많이 벌 수 있었고 해외여행을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럽과 미국 등의 일자리는 공산당이나 국가 간부, 잘사는 집의 자녀들이 차지했다.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지역의 외교와 무역 분야에도 일자리가 있었으나 일할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아시아 언어가 배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양 언어를 할 줄 알고, 이들 나라를 아는 사람은 소련에서 희소가치가 있었다.
-- 중국 역사학과 졸업 후에는 어떤 직업을 선택하려 했나.
▲ 나는 외교관이 될 마음도 없었지만, 그 직업을 받기도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서민 출신이기 때문이다. 나는 시골의 대학교에서 역사 교수를 맡을 생각은 있었다.
-- 1984년 북한 김일성종합대학교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 당시 레닌그라드 대학교 아시아학부는 한국역사학과를 만들 생각이 있었다. 교수님이 중국역사학과 학생 2명에게 솔깃한 제안을 해왔다. 한국어를 배우면 북한 유학을 시켜주고, 1명은 모교 교수로, 다른 1명은 모교 연구원으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그 2명 중 1명이 나였다. 우리 2명은 김일성종합대학교 조선말 강좌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북한 체류 기간은 1984년 9월부터 1985년 7월까지 10개월이었다.
-- 본인은 저서에서 "북한 주민들도 가족을 사랑했고, 승진하고 싶어 했고, 자식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고 싶어 했고, 병에 걸릴까 봐 걱정했고, 사랑에 빠지기도 했고, 낭만을 좋아했고, 음식과 좋은 책을 즐겼고, 한 잔의 술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 나는 레닌그라드대학 2학년 때부터 일반 국민이 아닌 당 간부나 전문가들만 읽을 수 있는 비공개 자료들을 접할 수 있었다. 대체로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내용이었다. 개인숭배가 있고, 경제 성장이 멈췄고, 이런저런 감시가 심하다고 했다. 김정일의 등장을 반대하는 군인들이 있다는 내용도 봤다. 이러니 나는 북한에 가기 전에 이 나라가 어두운 곳이라고 생각했다. 기관총을 가진 인민군이 거리 곳곳에 서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북한 날씨도 안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계속 구름과 비가 많을 것이라고 상상했다.

-- 막상 북한에 와보니 예상과 달랐다는 것인가.
▲ 평양에 도착한 1984년 9월 10일은 날씨가 좋았고, 하늘은 푸르렀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미인들도 많았다. 인민군들이 거리에 많았지만 무섭게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는 할머니들도 많았다. 어떤 책 제목 그대로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네'였다. 그런데 북한의 문제를 확인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북한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것인가.
▲ 북한 사람들은 대화를 자유롭게 하지 못했다. 여행도 마음대로 못했다. 외국 여행뿐 아니라 국내 여행도 어려웠다. 정치는커녕 역사에 대해서도 자유롭게 토론하지 못했다. 감시가 많기 때문이었다. 개인숭배 등 다른 문제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가장 심각하다고 생각한 것은 경제였다. 북한 사람들은 '밥과 고깃국'을 먹지 못했다. 북한에는 극복하기 어려운 빈곤이 있었다.

-- 김일성종합대학에는 여러 사회주의국가 학생이 와서 공부했나.
▲ 내가 유학했을 때는 중국, 체코, 동독, 캄보디아 학생들도 있었다. 파키스탄 여학생 2명도 있었다. 유학생들의 전공은 역사, 수학, 영어 등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언어연수를 하기 위해 왔다.
-- 유학생들도 많은 통제를 받았나.
▲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들과 달리 외국 유학생들의 생활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산책을 할 수 있었고, 도시 구경도 가능했다. 평양 시내의 거리 어디에도 갈 수 있었다. 제한도 많았다. 개인 집은 방문할 수 없었고, 혁명역사박물관도 마음대로 가지 못했다. 일반인들이 관람하는 영화관도 우리가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도서관 열람실과 도서 목록실에도 갈 수 없었다. 유학생들이 원하는 책은 도서관 특별 직원이 가져다줬다.
-- 북한 당국이 도서 목록까지 통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 외국 사람들이 도서 목록을 통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듯하다. 당시에는 소련, 중국 사람들이 북한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북한당국이 허용한 범위 내여야 했다.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소련 당국이나 중국 당국에 흘러가면 약점이 노출되고, 이는 협박받거나 불이익을 당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 우방국 소련에서 온 유학생을 정보원으로 의심했다는 것인가
▲ 유학생이 정보 요원은 아니라고 해도 스파이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의심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북한 당국자들의 논리는 외국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북한 당국은 자국민이 외국인과 접촉해서 외부 생활에 대해 지나치게 많이 알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 숙소는 어디였나.
▲ 소련 유학생들은 기숙사를 사용했다.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2인 1조로 방을 썼다. 그들 북한 학생은 나름대로 정보원 임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는 판단했다. 우리를 감시할 뿐 아니라 우리로부터 정보를 입수하는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 좋은 관계였다. 그들은 친절했고 머리가 좋았다.

-- 김일성종합대학교 학생들의 성향은 어떠한가.
▲ 열심히 배우는 학생들이었고, 해외 생활에 대한 호기심도 많았다. 출세하겠다는 야심도 갖고 있었다. 출신성분은 대체로 좋았는데, 주로 노동당 간부의 자녀 또는 경제일꾼(무역) 자식들이었다. 서민 집 자녀들이 없지는 않았다.
-- 이 학교에서는 무슨 학과가 인기가 있었나.
▲ 김정일이 졸업한 정치경제학과가 인기가 있었다. 외국어 학과는 무역일꾼이 될 수 있어서 학생들이 몰렸다. 공학과 물리학, 화학 등 이공계는 머리가 뛰어나지만 출신성분이 좋지 않은 학생들, 인맥이 없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 본인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나.
▲ 외국 학생들은 출신 국가별로 수업받았다. 소련 학생들 따로, 중국 학생 따로 수업받는 방식이었다. 우리 반에는 소련 학생 10명가량이 있었다. 선생님은 북한 사람으로, 수업 중에 러시아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언어를 배우는 데는 좋은 방식이다. 수업은 오전 9시부터 시작해서 오후 1시나 2시쯤 끝났다.
-- 수업을 마치고 오후에는 무엇을 했나.
▲ 북한 친구들과 식당에 가서 맥주를 마시는 일이 몇 번 있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북한 학생은 정보기관인 보위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외국인끼리 가는 것은 제한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술은 어디에서 먹었나.
▲ 당시에는 불법이었지만 술을 파는 식당이 있었다. 외국인이라면 외화상점에서 술을 많이 구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무 데서나 술을 살 수 있고 맥줏집도 시내에 있다.

-- 북한 젊은이들도 연애를 많이 하나.
▲ 내가 가끔 공원에서 산책할 때 젊은 커플이 연애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의 분위기로 봐서 연애하는 것으로 짐작했다.
-- 북한에서도 연애소설이 인기가 있나.
▲ 정치성과 정치선전이 없는 순수한 소설이 인기를 끌었다. 외국의 번역 소설이 그러했다. 그런 책은 자유롭게 팔리지 않았지만, 판매원과 관계가 있으면 슬쩍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북한 사람들은 여전히 문학작품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았다.
-- 다시 북한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나.
▲ 북한에 외국인으로서 체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외교관과 대북 지원 국제기구의 직원들만 가능하다. 북한 체류가 가능하다 해도 나는 학자로서 북한에서 살기는 싫다. 이 나라를 자유롭게 연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연구는 남한에서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북한 문학에 대한 연구도 남한에서 하는 게 낫다. 북한에서는 감시와 검열이 심하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말을 하면 추방당하고, 다시는 입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할 수 있다.

-- 외국의 학자로서 한국의 역대 정치인 중 한국의 발전에 가장 기여를 많이 한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나.
▲ 단연 박정희다. 이걸 의심한다면 객관적으로 역사의 진실을 판단할 능력이 안 되는 사람이다. 아니면 편파적 시각을 가진 사람이다. 중립적 역사학자라면 박정희를 꼽을 수밖에 없다.
-- 박정희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에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고, 남한 군인 시절에는 남로당에 가입하고는 본인이 살아남기 위해 동료 남로당 군인들의 명단을 정보당국에 통째로 넘겼고, 집권 이후에는 독재와 인권탄압을 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그런 사실은 나도 잘 안다. 그의 행보에는 이기주의와 출세주의가 없지 않았다. 그는 독재자였고,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정치적 자유도 막았다. 그렇지만 그의 성과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한국과 같은 경제 기적이 세계 역사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아무것도 없는 나라, 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선진국으로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결과적으로는 한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한 나라의 평균수명은 지도자를 평가하는 종합적인 지표인데, 한국은 1960년 52세에서 1980년 65세로 올라갔다. 13세나 점프한 것이다. 박정희가 이뤄낸 경제성과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줬다. 중국과 베트남이 빠른 경제성장을 이뤘는데, 그들이 모델로 삼은 것은 박정희 방식의 개발독재다.

-- 박정희 다음으로 대한민국에 기여한 사람은 누구인가,
▲ 김대중이라고 본다. 그는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었다. 물론 민주화의 토대는 튼튼한 경제다.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는 경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인 것은 맞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김대중은 젊은 시절이었던 1960년대부터 오랫동안 민주화를 위해 싸워왔던 사람이다. 한국 민주화에는 김대중의 기여가 크다. 박정희와 김대중은 살아있을 때 서로 대립했지만, 역사의 눈으로 보면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들이다. 국민들이 잘사는 민족국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것이 이들 두사람의 목표였다.
--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모순이 심한 사람이다. 그는 심한 부정부패에 눈을 감았고, 권위주의 독재정치를 하고도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했다. 경제 성장을 경시했던 사람이다. 개인숭배도 있었고, 비합리주의적 외교도 있었다.
-- 이승만이 없었다면 남한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북한 방식으로 출발했을 것이고, 박정희의 경제성장도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는데.
▲ 한반도 남쪽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운 사람은 이승만이 아니다. 한국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어하지만, 워싱턴과 모스크바가 분단을 결정했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는 그 분단의 불가피한 결과물이었다. 이승만이 없었다면 다른 사람이 남한의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 현재 한국 자본주의는 빈부격차가 심하고, 정규직-비정규직, 대기업-중소기업 간 착취관계가 형성돼 있고, 국회의원들과 의사, 법조인 등은 자기들만의 특권을 누리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법을 안 지켜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는데, 한국은 어떤 모델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시장경제는 성장을 너무 중시해서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사민주의(사회민주주의)를 거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북유럽의 스웨덴, 노르웨이 등이 사민주의 나라들이다. 그렇지만 이 시스템도 문제가 있다. 지속적 경제성장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가 취약해지면 국방력이 약해지고, 다른 나라들에 의해 침략을 당할 수 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그런 위험이 있다.
-- 사민주의에서는 왜 경제력이 약해지나.
▲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호주국립대에서 교수로 일할 때였다. 나 역시 추가 소득이 발생하면 절반가량은 국가에 세금으로 내야 해서 추가로 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내가 아는 현지의 한 여성 학자는 대학교 연구 교수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는 사회복지금을 받아 살고 있었는데, 교수가 되더라도 급여가 많이 늘지 않고 자기의 자유로운 시간은 많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매우 검소하게 살았던 그 여성 학자의 논리를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keunyou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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