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동=뉴스1) 윤슬빈 관광전문기자 = 봄이면 초록빛이 먼저 고개를 내미는 곳이 있다. 차(茶)나무 새잎이 피어나는 그 계절, 하동의 어느 깊은 산자락은 가장 먼저 '녹차'로 봄을 맞는다. 그곳엔 천 년을 이어온 차향이 있고 자연 그대로의 느린 길이 기다리고 있다.
차(茶) 애호가가 인정하는 '하동 녹차'
하동은 보성, 당진, 제주 등 다른 녹차 산지에 비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실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의 고장이다.
신라시대부터 차나무를 재배해 온 유서 깊은 땅이며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는 자연 그대로의 야생차밭에서 자란다.
다른 지역이 정돈된 관광형 차밭을 중심으로 '예쁜 풍경'으로 기억된다면 하동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사람 손보다 바람과 비, 안개와 흙이 먼저 차나무를 키우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진정한 차 애호가들 사이에선 하동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차의 원산지'로 통한다.
하동군의 차밭은 대부분 섬진강과 그 지류인 화개천을 따라 형성되어 있다. 안개가 많고 습기가 많고 봄엔 아침 저녁 온도차가 뚜렷하다. 토양은 수분이 많고 자갈이 섞여 찻잎은 천천히, 그러나 깊게 자라난다.
이런 천혜의 조건 속에서 자라나는 하동 녹차는 2003년,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하동녹차'란 이름으로 지리적 표시제 제1호 등록을 받았다.
천년 차향의 시작, 화개
하동군의 중심에 있는 '화개면'은 벚꽃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고장이지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차나무가 자라고, 사람이 찻잎을 따던 곳이다.
신라 흥덕왕 3년(828년), 김대렴이라는 인물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처음으로 심은 자리가 바로 화개면 쌍계사 아래다.
'삼국사기'에 남겨진 그 기록은 지금의 차 시배지로 그 자리에 조용히 표지석 하나로 남아 있다.
특히 화개면은 '제다'(製茶·차를 제조하는 과정 또는 장소)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이다.
차밭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삶의 한가운데 있었다. 마을 골목마다 제다간이 있고 문을 열면 덖음솥에서 김이 피어난다.
하동군 전체에 1200헥타르가 넘는 차밭이 있다지만, 진짜 차를 만들고 있는 곳은
이곳, 화개다. 화개천을 따라 걷다 보면 400여 곳 넘는 제다들이 산기슭에 스며들듯 존재하고 있다.
천년 다향길, 걷다 보면 알게 되는 길
화개에 가면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길이 있다. 이름부터 고요한 '천년 다향길'. 차의 고장이라 불리는 하동 화개면에서 천 년을 이어온 차 문화와 자연을 따라 걷는 길이다.
길 곳곳에 특별한 무언가가 기다린다. 세모 지붕의 오두막인 '야외 찻자리'이다. 찻상 하나, 벤치 몇 개가 놓인 이런 찻자리가 화개천을 따라 걷는 천년 다향길 곳곳에 놓여 있다.
천년 다향길의 시작은 쌍계사다. 쌍계사는 신라 때 지어진 사찰로 두 갈래 계류가 만나는 자리, 산 아래 낮은 길에 들어앉아 있다. 봄이면 사찰 뒤편 산자락에서 찻잎을 따고 덖는 템플스테이가 열리는데 그 차분한 체험은 마음마저 가라앉힌다.
쌍계사를 나서면 금세 '차 시배지'를 만난다.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가져온 차 씨앗을
이곳에 처음 심었다는 기록을 남긴 자리다.
한 나라의 차 문화가 시작된 자리는 의외로 조용하고 면적은 3116㎡(약 940평)로 다소 소박하다. 하지만 그 앞에 서면 누구든 경건해진다. 시작이란 늘 그런 법이다.
차시배지 산책길을 따라 쌍계초등학교, 목암마을을 지나 30분가량을 걸으면 암차밭들이 끝없이 펼쳐지며 '만수가 만든 차밭'으로 불리는 '만수다원'이 나타난다.
저 멀리서 한적한 산비탈에서 찻잎을 손질하고 있는 차밭의 주인인 홍만수 대표도 우연히 만날 기회도 주어진다.
인사를 나누자, 홍 대표는 레일을 타고 내려와 푸근한 미소와 함께 "차 한 잔 하시고 가시죠"라며 '야외 찻자리'로 이끌었다.
그는 "여기 차도 제가 매일 갖다 놓는다"며 항아리에 담긴 덖어 놓은 찻잎을 덜어 처음 보는 여행객을 위해 차를 직접 내어 준다. 이곳의 야외 찻자리는 다른 곳보다 더 특별하다. 홍 대표는 직접 전기 포트를 사용할 수 있도록 태양열을 이용해 전기도 설치하고 식탁도 들여놨다.
더욱 특별한 것은 그가 내놓은 차이다. 만수다원은 100년 넘은 바위 틈새에서 자라는 '암(巖)차밭'으로 화개 전체에서도 네 번째로 규모가 크다. 30년 전 인수한 백년 암차밭을 그는 매일 돌보며 하동의 차 문화를 조용히 이어오고 있었다.
이날 마신 차는 홍 대표가 어린 시절 '고뿔'(감기)에 걸렸을 때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홍차를 생각하며 만든 고뿌레차였다.
마지막 목적지는 화개에 있는 차밭 중 가장 많은 발길이 멈추는 정금다원. 넓게 트인 고갯마루에서 계단식 차밭과 지리산 능선을 한 프레임에 담을 수 있는 곳이다.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이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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