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손성진 칼럼

[손성진 칼럼] 정치와 법의 탈분화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5.05 18:51

수정 2025.05.05 19:18

근대에 정치서 분리된 법
판결 불복, 사법부 통제로
정치가 법을 예속화 기도
논설실장
논설실장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이 퇴임 후 탄핵심판이 길어진 이유에 대해 언급했다. 만장일치를 위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다. 8대 0을 이끌어 내기 위해 평의가 길어졌다는 세간의 소문이 사실이었던 셈이다. 엄격히 하자면 6대 2든 7대 1이든 있는 그대로 소수의견을 공표했어야 했다. 탄핵심판 후의 이런 후문은 헌재가 법대로 하지 않고 정치적 결정을 내렸음을 확인시켜 준다.

만약에 반대 의견을 낸 한두명의 재판관을 찬성 의견으로 돌아서도록 설득했다면, 국정안정의 목적이 있다 해도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다.

대법원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에게 유죄 취지 판결을 내린 것도 논란을 피해 가지 못했다. 선거 직전의 초고속 재판이 사법부의 정치개입이라고 민주당과 지지자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정치고, 무엇이 법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의 시대가 돼가고 있다.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다.

정치에서 법이 분리된 것은 민주주의가 싹튼 근대 이후다. 정치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법률체계와 사법제도를 정비하고 삼권분립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보장했다. 정치권력이 아닌 법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법의 지배'다. 그러나 정치의 사법화로 민주주의의 근본인 법의 정치와 삼권분립이 붕괴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정치와 법이 서로 뒤엉켜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지경이 돼버렸다.

문제의 시초는 타협의 기능을 상실한 정치에 있다. 갈등조정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가 사법부에 정치적 사안을 떠넘기는 바람에 법과 정치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거대하고도 민감한 정치적 문제를 넘겨받은 사법부는 스스로 정치화되어 조변석개식 정치적 판결을 내리는 일이 다반사다. 법에 정치적 사심이 개입되는 이상 오직 법조문만 따르는 판결이 나올 수 없다. 법의 신뢰성은 추락한다. 이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맡은 1심과 2심이 같은 사안을 놓고 전혀 다른 판결을 내린 것은 정치화된 사법부의 현실이다.

대법원은 엇갈린 해석에 대해 법적 판단을 신속히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정치 아닌 법을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민주당이 그런 대법원을 노골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사법부를 통제하고 마음대로 국가를 운영하겠다는 것은 상호 견제를 넘어 입법권 남용이다. 법이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휘두르는 전근대적, 반민주적 '법에 의한 지배'다.

법의 산파인 정치가 도리어 법의 파괴자가 된다. 지금 한국 정치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정치와 법의 '탈분화'(dedifferentiation)를 예상하면서 현대 국가에서 법이 정치적 통제하에 놓이게 될 것이라고 우려한 사람이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이다. 탈분화는 정치에서 분리된 법이 다시 합쳐져 근대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다. 법과 정치의 재통합은 사법부의 와해, 나아가 민주주의의 후진을 부를 것이다.

여야를 불문하고 법적 판단에 승복하지 않는 정치권에서 그 위기감이 느껴진다. 정치가 법과 판결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으로 국가와 국민을 통제하려 들면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뻔하다. 만약 민주당이 집권한다면 유일한 걸림돌이 사법부다. 준사법기관 검찰의 무력화에 대한 계획도 서 있기 때문이다. 사법부마저 장악한다면 삼권을 손아귀에 넣은 무소불위의 정권이 된다. 그를 위해 사법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사법부를 예속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을지 우려된다.

더 큰 문제는 사법부 내에 있다. 정치화된 법관들이 정치적 판결을 남발하는 중이다.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 90도로 인사한 전임 대법원장도 있다. 사법부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렸다. 정치가 법을 망가뜨린 것도 있지만, 법이 먼저 무너져 내린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법부가 강건해야 민주주의가 산다.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사법부 자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법관들이 정신을 차리고 정치색을 탈피해야 정치 종속을 면할 수 있다. 법이 바라볼 것은 정치가 아니라 국민이다.
이념과 이익에 매몰된 것은 아닌지 자성이 요구되는 시간이다.

tonio66@fnnews.com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