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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시선] 펠리페 2세와 트럼프 대통령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5.05 18:52

수정 2025.05.05 19:19

오승범 증권부장
오승범 증권부장
대항해시대 최절정기인 16세기에 패권국가는 파죽지세로 식민지를 팽창한 스페인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 동남아 등에서 전 세계 총생산량의 80%가 넘는 금과 은이 밀물처럼 유입돼 최고 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 때문에 당시 '페소 데 오초' 은화는 기축통화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은화 공급이 넘치면서 화폐가치가 떨어졌다. 더구나 잉글랜드, 프랑스 등 종교개혁 국가들과 천문학적 전쟁비용이 투입되면서 독일 금융가로부터 금, 은을 담보로 돈을 빌려야 했다.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는 전쟁 중에는 돌려막기로 빚을 갚는 악순환에 빠졌다.

국가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이자조차 상환하기 힘든 재정적자에 몰리자 국왕 펠리페 2세는 가장 수월한 증세를 택했다. 토지 등 일부에 부과되던 세금을 생필품 등 전방위로 확대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패착이 됐다. 물가는 가파르게 치솟고 경기가 침체되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장기화되면서 국운이 기울었다. 이후 등극한 펠리페 3세가 국고를 늘리기 위해 주화를 모두 은에서 구리로 바꾸면서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했다. 은과 금이 대거 해외로 빠져나가는 국부 유출로 화폐가치는 더 하락해 통화질서가 붕괴되는 등 경제는 파탄으로 치달아 맹주 스페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21세기 세계 최강국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봉착한 현실과 정책은 펠리페 2세와 묘하게 오버랩된다.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는 지난해 1조8300억달러(약 2630조원)로 매년 국채를 발행해 돈을 빌려야 한다. 연간 국채 이자만 1600조원이 넘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언한 우크라이나전쟁과 가자전쟁 종식은 요원해 보인다. 미국은 지난해 말까지 우크라이나전에 약 1750억달러(약 252조원)를 쏟아부었다.

가중되는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빼든 건 고율관세다. 세금을 내부가 아닌 밖에서 더 거둬들이는 증세다. 하지만 관세폭탄은 제품 가격 상승을 유발해 물가를 밀어올린다. 실제 지난달 국제통화기금(IMF)은 미국의 올해 물가상승률을 기존보다 1.0%p나 상향한 3%로 높여 잡았다. 반면 경제성장률 전망치는 올해 1.8%, 내년 1.7%로 기존보다 각각 0.9%p, 0.4%p 낮췄다. 미국 상무부가 집계한 올해 1·4분기 국내총생산(GDP)은 -0.3%(직전분기 대비 연율)로 2022년 1·4분기 이후 3년 만에 역성장했다. 지난달 셋째주에는 미국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단기간에 0.5%p 급등하고, 달러가치는 5% 가까이 떨어져 월가를 충격에 빠뜨렸다.

세계 경제가 불안하면 미국 국채 수요가 늘어나 금리는 떨어지고, 안전자산인 달러의 가치는 오르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둘 다 흔들리면서 시장은 미국에서 돈이 빠져나가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이어 같은 달 21일(현지시간)에는 미국의 주식, 달러가치, 채권 가격이 일제히 급락했다. 이 역시 미국에 돈을 맡겨두기에 불안하다는 투자심리가 반영된 결과다. 패권국, 대규모 재정적자, 증세, 화폐가치 하락, 스태그플레이션 우려, 군비 부담 등은 펠리페 2세와 트럼프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된 키워드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에겐 금리와 환율이 있다. 금리를 낮추면 자칫 물가상승에 기름을 부을 수 있지만, 국채 이자를 줄이는 동시에 달러가치 하락 압력으로 자국 기업 수출 경쟁력이 높아져 무역적자 해소를 기대할 수 있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 의장을 향해 해임 발언을 서슴지 않은 것도 금리인하에 신중한 스탠스가 마뜩지 않아서다. 금리인하는 시기의 문제이지 방향성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중장기적으로 미국이 금리를 더 낮추면 달러가치 하락으로 원화가치 상승은 불가피하다.
K수출 기업들은 관세폭탄뿐 아니라 가격경쟁력 저하 등 이중고에 시달리는 반면, 그만큼 미국의 곳간은 채워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 경제의 가시밭길은 길고 더 험난할 것으로 보여 신발끈을 다시 동여매고 위기 돌파에 매진해야 한다.
어떤 리스크든 적응할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winwin@fnnews.com 오승범 증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