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KT는 해킹 사고 이후 유심교체와 유심보호서비스라는 두 가지 해법을 내놨다. 물량이 부족해 유심교체 서비스 첫날부터 긴 대기줄이 이어졌다. 교체를 못하고 돌아간 손님들도 많았다. SKT가 백번 사과할 일이다. 다만 어느 통신사라도 필요한 유심 물량을 단기에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첫날 이통 3사가 가진 모든 유심을 동원하더라도 물량 부족은 피할 수 없었다. 교체 수준에 준하는 유심보호서비스 가입자 수는 6일 오전 9시 현재 2400만명을 넘어섰다. 현재까지 물리적 피해사례는 보고된 바 없다. 복제폰이 개통되거나 금융자산이 탈취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정치권 일각에서는 위약금 전면 면제를 요구한다.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해결책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후폭풍이 만만찮다. 우선 피해 발생 없이 위약금을 면제해 줄 경우 사업자의 미래고객 기반 자체가 흔들린다. 기업만이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수만명의 대리점주, 판매점, 협력사 인력들이 엮여 있다. 위약금을 면제하고, 해지를 부추긴다면 대리점 신규 가입은 끊기고, 매출은 반토막이 된다. 이는 결국 2차, 3차 피해로 확대될 수밖에 없다. 형평성 문제도 만만찮다. SKT 가입자는 각기 다른 약정과 단말기 조건을 갖고 있다. 공시지원금으로 보조금을 받은 가입자는 잔여 약정기간에 따라 위약금이 천차만별이다. 반면 선택약정을 택해 요금할인만 받고 단말은 자비로 산 가입자는 받을 수 있는 보상이 극히 제한적이다. 계약은 책임과 이익을 동시에 수반한다. 정치권이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순간, 시장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위약금 면제 논리의 기반에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해킹 피해 우려가 있다. 특히 유튜브가 이런 공포를 극대화했다. 해커가 유심 정보를 기반으로 복제폰을 만들고, 이후 그 폰을 이용해 금융계좌에서 돈을 직접 빼갈 수 있다는 논리까지 나왔다. 이런 해킹이 구현되려면 이용자의 주민번호와 계좌, 비밀번호, 인증키까지 모두 유출돼야 한다. 복제폰을 만들더라도 개인정보를 이용한 로그인과 인증과정 등의 복잡한 절차가 남아 있다.
일각에선 미국 통신사의 해킹 사례를 들어 공포를 키우는 중이다.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게 T모바일, AT&T의 해킹 사고다. 이들 사례는 이름, 사회보장번호, 운전면허번호, 신용정보 등이 직접 유출된 대형 사고였다. 그럼에도 법적 절차와 손해 입증 과정을 거쳐 합의금이 책정됐다. 한국에서 이런 절차 없이 무조건적 보상을 요구한다면 기업을 제대로 영위하기 어렵다. 최근 입법조사처가 이통사 귀책사유로 해킹 발생 시 고객은 약관을 근거로 위약금을 면제할 수 있다는 취지의 해석을 내놓았다고 한다. 정치권은 이를 판결문처럼 과대포장하고 있다. 국회 보조기관인 조사처를 사법기관의 판단처럼 인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치권이 찾는 '원터치' 해법은 최태원 SK 회장 청문회 소환이다. 원하는 답은 딱 한 가지다. 하지만 이는 현재 상법을 무시하는 방안이다. 정치권은 줄곧 기업에 이사회 중심 책임경영을 지향토록 강조해왔다. 국내 상법과 기업지배구조를 따라야 한다는 논리다. 그럼에도 특정 사안이 생기면 일단 총수를 호출한다. 이사회와 경영진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도, 총수에게 초법적 지위가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셈이다. 발생하지 않은 리스크를 감안해 기업에 무리한 결단만을 강요하는 게 정치권의 역할인지는 한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ksh@fnnews.com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