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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일의 세상만사] 판결도 정치도 ‘맥락지능’이 필요할 때

노동일 기자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5.05.07 19:17

수정 2025.05.07 19:17

李발언 맥락 중시한 대법
판결 속도만 비판은 잘못
결국 유권자가 판단할 몫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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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이 없으면 의미가 없고, 맥락이 바뀌면 의미가 바뀐다." 매슈 커츠의 '맥락지능'에 나오는 말이다. '맥락'이라는 영어 단어(context)는 라틴어 콘텍스테레(contextere)에서 유래했다. 태피스트리(무늬를 수놓은 직물 작품)를 만드는 방법을 묘사할 때 쓰이는 용어라고 한다. 정교하게 짜인 직물에서 무늬를 구성하는 한올 한올은 의미가 없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감상하는 대신 무늬를 이루는 가닥을 하나하나 구별해 내려 한다면 무의미할뿐더러 직물 전체를 망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난 1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법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가 있었다. 대선 유력 주자에 대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1심, 전부 무죄를 선고한 2심의 상고심으로서 관심을 끈 판결이었다. 원심(2심)을 파기하고 유죄 취지로 서울고법으로 환송한 판결은 후폭풍을 낳고 있다. 민주당은 대법원장, 대법관 탄핵을 위협하며 이 후보에 대한 모든 재판을 중지하라는 '명령'까지 내놓고 있다.

위에서 '맥락'을 언급한 것은 현 사태를 관통하는 키워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법원 판결은 이 후보의 발언을 전체적 맥락에서 보지 않고 하나하나 조각 내서 분석한 2심을 비판하고 있다. 고 김문기씨와 "골프를 친 것처럼"이라는 발언에 대해 대법원은 이렇게 설시한다. "이 후보의 '발언 전체의 맥락은' … 그와 함께 골프를 쳤다는 구체적 교유행위를 부정하는 취지이기 때문에, … 피고인이 김씨와 해외출장을 같이 갔지만 해외출장 기간 중에 함께 골프를 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자연스럽다."

'국토부 협박' 때문이라는 백현동 관련 발언에 관해서도 대법원은 "발언의 의미를 확정할 때는 사후적으로 개별 발언들의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추론하는 데에 치중하기보다는, 발언이 이루어진 당시의 상황과 '발언의 전체적 맥락에 기초'하여, 일반 선거인에게 발언의 내용이 어떻게 이해되는지를 기준으로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판결의 실체적 내용 대신 대법원의 신속한 절차에 대한 비판도 맥락을 잊은 것이다. 선거법 사건은 '6·3·3' 원칙에서 보는 바대로 1년 내에 결론을 내야 한다. 대법원은 2년 이상을 끈 1심의 잘못과, 180도 다른 1심과 항소심의 혼선을 바로잡기 위해 대선을 앞두고 속도를 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허위사실 유포로 2023년 6월 기소된 박경귀 전 아산시장의 경우 1심부터 상고심까지 7개월이 걸렸다. 파기환송심은 6개월, 재상고심까지 3개월 만에 유죄가 확정되어 시장직을 상실했다. 최명현 전 제천시장의 허위사실 유포 사건도 2015년 2월 기소부터 8월 상고심까지 불과 6개월 만에 결론이 난 바 있다.

'사법부의 선거개입' 운운도 맥락을 잘못 잡은 비판이다. 대법원 판결은 어떤 발언이든 맥락을 고려하여 전체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면 그 의미가 왜곡된다는 평범한 이치를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유무죄를 놓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방치한다면 정확한 정보에 바탕을 둔 유권자의 선택을 방해하는 게 될 수도 있다. 만약 대법원이 파기자판을 했다면 법의 힘으로 유권자 국민의 선택을 가로막아 더 큰 파장이 일었을 것이다. 대법원은 법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빠르게 정리한 것이고, 최종적인 정치적 선택은 유권자의 몫으로 남긴 것이라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판결에 따른 정치적 파장을 축소할지 확대할지는 정치권의 대응에 달려 있다. 대법원장, 대법관 탄핵 운운은 그런 면에서도 현명하지 않다. 사법부 장악 우려로 중도층의 마음을 떠나게 하고 후보에 대한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이다.
"대법원이 유죄 취지 파기환송을 했으니까(혹은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유권자인 국민이 판단해 달라"는 게 현명한 대응 아닐까. 법원은 법원의 일을, 정치는 정치의 일을, 유권자는 유권자의 일을 해야 한다는 메시지임을 알아야 한다. 커츠 교수는 맥락지능을 높이는 최종 단계가 '역지사지'라고 한다.
쉽고도 어려운 일이지만 판사, 정치인, 유권자 모두 역지사지의 자세로 맥락지능을 높여야 할 때이다.

dinoh7869@fnnews.com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