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어 '보사이(防災)'는 우리말 '방재'에 해당한다. 폭풍, 홍수, 지진, 화재 등 각종 재해를 예방하고 그 피해를 줄이는 활동을 의미한다. 지난 1~3월 일본 고베에 위치한 아시아재난경감센터(ADRC)에서 보사이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올해는 고베 대지진 30주년이라 의미가 깊다.
대부분의 다른 일본 도시와 마찬가지로 고베도 바다와 맞닿아 있고, 배후에는 급경사의 산이 있다.
고베에서는 약 3개월 동안 다양한 보사이 관련 행사가 열렸다. 가족 단위로 참여하는 체험행사, 청소년이 주축이 되는 국제 보사이 페스티벌, 시 주관의 대피 및 대응 훈련 등이 이어졌다. 시민 개개인의 생존 역량을 키우기 위한 문화적 투자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곳은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 지진 재난 추모공원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은 곳이다. 지금은 대부분 복구됐지만 방재대책청사의 잔해가 추모와 교육의 목적으로 보존돼 있다. 청사는 3층 높이의 철골 건물이다. 옥상에 설치된 통신탑에 매달려 대피하던 공무원들의 영상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면서 방재교육의 상징이 됐다.
일본 기상청은 쓰나미 높이를 6m로 예보했지만 실제로는 20m를 넘었다. 방재대책청사에 근무하던 공무원들은 예보에 따라 옥상으로 대피했으나 결과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 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끝까지 대피방송과 주민안내를 멈추지 않았던 그들의 선택은 방재의 최전선에 있는 이들조차 예보와 매뉴얼 만으로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일본 체류 중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다시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서는 일반인에조차 낯선 '해저드맵(Hazard Map)' 개념을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고, 자신 만의 지역 해저드맵을 만들어 발표하는 모습을 보았다. 해저드맵은 홍수나 쓰나미 발생시 위험지역과 대피소를 시각적으로 나타낸 지도다. 일본의 방 교육은 초등학교부터 시작된다.
반면, 한국에서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해저드맵을 제작하고 배포하고 있으나 대부분의 시민은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단순한 정보 제공의 문제를 넘어 보사이를 삶의 문화로 승화시키지 못한 한계다.
일본에는 재난으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전국 각지에 있다. 그들의 안타까운 사연은 하나같이 대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매뉴얼, 공식예보, 공공지시 만을 신뢰하고 따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지침은 가정된 시나리오를 전제로 만들어졌기에 실제 상황이 달라졌을 때 오히려 생존을 가로막는 '덫'이 될 수 있다.
생존을 위해선 외부정보뿐만 아니라 현장의 변화를 읽고 자율적으로 판단하는 능력, 경우에 따라 지시를 벗어나 대피를 감행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일본은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이 같은 교훈을 교육에 담아 초등학생 때부터 훈련시키고 있고, 이를 통해 '보사이' 문화를 내면화하고 있다. 일본은 지금도 재난안전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의식 수준 격차를 좁혀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영규 한국화재보험협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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