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방코르는 달러 기축체제의 구조적 대안으로 설계된 통화 시스템이다. 블록체인 기반의 정산 및 유동성 조정 메커니즘으로, 발행부터 소각까지 전 과정이 알고리즘 규약에 따라 실행된다.
전 크레딧스위스 이코노미스트 졸탄 포자르는 '브레튼우즈 III' 기고문에서 글로벌 통화를 '인사이드 머니'(신용 기반 화폐)와 '아웃사이드 머니'(실물 기반 자산)로 구분했다. 그는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이후 지정학적 분열과 공급망 재편 속에서 아웃사이드 머니의 위상이 강화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디지털 방코르는 특별인출권(SDR) 통화의 유동성과 금·비트코인의 정치적 중립성을 결합해 다자간 준비자산 바스켓을 구성한다. 각 자산의 비중은 글로벌 유통량, 가격 안정성, 국제 수용도 등을 반영해 동적으로 조정된다.
디지털 방코르 통화는 준비자산의 실시간 가치와 네트워크 규약에 따라 자동 발행되며 한도는 유통량, 변동성, 시스템 리스크 등 지표에 따라 결정된다. 발행된 통화는 각국 계정에 등록되어 무역 정산과 유동성 조정에서 계산 단위(unit of account)로 기능한다. 이 구조는 무역수지 격차를 조절하는 인센티브 메커니즘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달러 스테이블코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역, 자본 이동, 외환 결제 등 주요 지표는 온체인에 기록되며, 각국의 방코르 계정 잔액은 이에 따라 자동 갱신된다. 무역흑자가 기준을 초과하면 시스템은 유입 잔액을 감축하고, 초과 방코르는 예치 확대, 일부 회수, 또는 상대국 계정과의 상계 방식으로 처리된다. 이는 외화 과잉과 유동성 왜곡을 방지하기 위한 자산 재배치 장치로 작동한다. 반대로 적자국은 일정 조건 하에 정산 의무가 유예되거나, 공동 유동성 풀을 통해 한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한 준비자산 가치가 급락하거나 흑자 계정에 과잉 유입이 지속되면, 초과 방코르는 자동 소각되거나 추가 담보 요구가 발동된다. 통화는 더 이상 일방적 공급의 대상이 아니라, 순환과 균형 속에서 스스로 조율되는 구조다. 디지털 방코르는 '누가 통제하는가'보다 '어떻게 자율적으로 균형을 회복하는가'에 초점을 맞춘 설계다.
코드와 합의로 작동하는 이 새로운 통화 시스템은 누구도 단독으로 통제할 수 없는 '기록과 정산'의 질서다. 달러 체제가 흔들리는 지금, 미국 역시 글로벌 유동성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한 시점이다. 디지털 방코르는 주요국이 급격한 충격 없이 구조 전환에 참여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자, 통화 문명의 다음 진화를 향한 도약이다.
김종승 엑스크립톤 대표·블록체인법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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